사랑이 갈래에 선 순간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시절이
한 번쯤은 있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인기 많은 사람들의 자기기만처럼
그런 경험은 내게 오지 않을 거라 믿었기에.
하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기어코 찾아오곤 했다.
선배는 환영회 때부터 그랬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웃어주고
긴장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가끔씩 느껴지는
선배의 따뜻한 눈빛 역시
그저 남자 동기들이 모두 떠난 뒤,
어색해하던 나를 위로하는
그런 다정함 정도로만 느껴졌다.
선배와 함께 조별과제를 마치고 난 뒤,
어째선지 우리만 약속이 없던 그날은
유독 공기가 시원하고 상쾌했다.
"너는 어떤 남자 좋아해?"
"음, 다정하고 착하고 나만 봐주는 남자요."
"나는 그런 남자 같아?"
선배는 장난처럼 물었지만,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듯,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음… 선배라면 여자친구한테 잘하지 않을까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내 말이 얼핏 선을 긋는 듯하게 들렸다는 걸 느꼈다.
선배는 작게 웃었지만,
그 웃음엔 망설임과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선배의 고백은 조용했지만 오래 맴돌았다.
선배는 내가 꿈꾸던 대로 익숙하고 따뜻한 온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길을 걷다 바람이 불면
아무 말 없이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고,
기침 한 번이면 따뜻한 캔커피가 내 손에 쥐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선배의 다정함은 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운명처럼 네가 동아리에 들어왔다.
가입 첫날부터 같은 고향 출신이라며 너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재수를 했기에 동갑이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고,
그 거리감 없음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자꾸 친한 척 나에게만 반말을 던지는 것도,
농구 후 땀 냄새를 풍기며 동아리방에 오는 것도,
내 친구들과 위험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MT에서 같은 조가 되어 춤을 추게 된 것도.
하지만 춤을 추는 너의 모습은 달랐다.
네 얼굴에 드리운 진지한 표정은,
팔을 휘두를 때 도드라진 힘줄은,
고생했다며 두드려주던 네 따뜻한 손길은,
평소 알던 네가 아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MT의 밤은 금세 찾아왔고,
우리는 MT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니, 네가 자연스레 MT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네 자리였던 사람처럼.
"여기서 뭐 해?"
시원한 새벽공기가 장기자랑의 열기를 잠재우고,
커플의 새로운 소식이 사람들의 관심에 불을 붙일 무렵,
너는 약한 술 냄새와 함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냥... 조금 정신없어서."
기분 좋게 들뜬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나만 소외된 기분을 들게 했다.
시원한 바람이 그런 기분을 날아가게 해 줄 것만 같았다.
"나랑 한잔 더 해야지."
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무 많이 마셨어."
잠시 고민하던 너는 순식간에 한 잔을 들이켰고,
들어가려던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네가 단숨에 넘긴 그 한 잔이,
우리 사이의 경계를 조용히 허물어뜨렸다.
"미안한데, 술 아니면 지금 말 못 할 것 같아.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조용히 속삭여진 너의 목소리는
시원한 바람이 되어 나를 헤집었다.
그리고 어느새 거대한 태풍이 되어
마음속의 수많은 것을 뒤섞으며 흔들고 있었다.
너의 말이, 너의 숨소리가, 너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모든 공기를 천천히 채워가고 있었다.
‘많이 마셨어? 괜찮아?’
내 손이 떨리는 이유가
방금 도착한 선배의 걱정 섞인 문자인지,
아니면 내 앞에 서 있는 너 때문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