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하사색 Apr 05. 2022

여전히 나는 방문객일 뿐이다

 

 몇 해 전부터 이 맘 때가 되면 내가 디자인한 회사 전단지를 아파트 광고판에 붙이기 위해서 아파트 관리실을 찾아간다.

  서울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3400여 세대의 아파트 지하 1층과 지하 2층은 제법 크고 복잡하다.

  처음에 방문했을 때는 아파트 지하에 복잡하게 얽힌 도로들과 천장에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배관들이 영화에서나 보던 지하도시에 와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도 했다. 

  이제는 제법 능숙해져서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관리실에 찾아가 사업자등록증과 주민등록증을 제출하고 거액(?)의 광고비를 입금하고 나면 관리실 직원은 아파트의 50여 개의 단지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카드키와 단지들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 약도를 건네준다. 

  서울 중심지에 세대가 많은 아파트이기 때문인지 A4만 한 광고 자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오전에 지하 1층과 2층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드키가 없는 방문객들이거나 아파트 관리인들이다. 

  그나마 나는 광고비와 주민등록증을 담보로 잡고 단지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카드키를 받았지만 여전히 나는 방문객일 뿐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은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테지만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간극이 벌어져 있다.

  삶 속에서 한 번쯤 겪게 되는 역경도 누구에게나 주어지겠지만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빠져나오리라는 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할 일이다.

  부동산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부동산 임장을 다녀보기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들이 이제는 눈에 띄기 시작하고 업체에서 내는 광고비들이 아파트 직원들의 임금에도 일부 사용되겠지, 돈이 돌고 도는구나 별 쓸데없는 생각들이 맴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낯선 곳, 1년 만에 다시 찾은 아파트 지하에서 가야 할 단지를 찾지 못해 헤매는 나에게 단지들의 위치가 그려진 약도 한 장은 어느 누구보다 친절하고 든든했다.

  2만보를 걸었던 오늘 하루가 부동산을 공부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들어 줬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꾸준함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