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 (건축설계) 퇴직한 건축연구자 • 유학준비생, 남, 31세
배달도시락 백반 기본형
가정의 달 선물 법성포 보리굴비 특대 5미
야근이 이어지던 4월이었다. 4월 초 회사의 건축 공모(현상공모)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력이 필요했다. 4월 둘째 주에는 92시간을 일했고, 4월 29일이 되어서야 현장 발표가 끝났다. 그럼에도 실시설계 작업은 연일 해치워야 했는데, ‘평소에 야근했으면 일이 안 밀린다’는 말이나, ‘대체휴일도 쉬어야 하며 6월 중순까지는 휴가 낼 생각 말아라’는 말이 큰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해야 할 일이 나의 능력과 역량을 조금 상회하는 상황에서 상사에게 인력 보충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밑으로 후임이 네 명이나 들어왔는데 모두 다른 팀에 배정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합리적인 이유라도 회사의 구조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자유로워진 신분 덕분인지, 내 마음은 감정적으로 더욱 부당함을 느꼈다.
다양한 이벤트들이 있었던 2월과 3월에 비해서 소비 금액이 100만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회사 일이 바쁘면 그만큼 소비가 줄고, 자연스럽게 월급을 많이 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을 때도 있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연장근로수당을 잘 챙겨주니, 반복되는 야근이 마냥 불평스럽지만은 않다. 하지만 회사의 복지 덕분에 이직이나 퇴직을 망설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막연하기만 해 보이는 박사지원 준비는 차일피일 미루고, 조금이라도 더 회사에서의 급여 수준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렸다.14 회사와 집의 루틴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소비도 비슷해졌다. 덕분에 이번 달 가계부에는 틀에 박힌 회사 생활을 표상하는 소비 지표들이 드러났다.
2월 총지출 2,130,658원
3월 총지출 2,484,733원(전월 대비 +354,075원)
4월 총지출 1,518,068원(전월 대비 -966,665원)
아침 편의점
따르릉 하는 편의점 유리문을 들어서면 차갑게 소독된 공기가 나를 맞이한다. 주저 없이 가장 앞쪽 신선 코너에 가면 샌드위치가 늘어서 있다. 칼로리가 조금이라도 낮은 걸로, 단백질 함량이 낮지 않은 걸로, 그렇다고 너무 비싸지 않은 걸로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한다. 평일 오픈하시는 직원분은 늘 한결같다. 카드를 꼽아놓고 잠시 기다리면 늘 ‘되셨어요’라고 말해 주신다.16 같은 건물에 위치한 회사로 올라가 출근 지문을 찍고 자리에 짐을 내려놓는다. 탕비실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내리고 자리로 돌아온다. 샌드위치를 까먹다 보면 다른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한다. 대충 시간을 보내다 업무를 시작한다.
보통의 점심 식사
가장 보통의 점심 식사는 뭘까? 3월 말쯤 회사에 날아온 전단지는 도시락배달을 하는 업체가 나눠준 것이었다. 한동안 탕비실 냉장고에 붙어있다가 누군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는지, 갑자기 배달 도시락 붐이 일었다. 기본 4찬은 동일하지만 천 원을 추가하면 반찬이 하나 늘고, 천 원을 더 추가하면 국까지 먹을 수 있는 구조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6천 원, 7천 원짜리 백반을 주문하지만 나는 5천 원으로 족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배달 도시락인데 반찬 하나로 큰 의미가 더해지진 않는다는 생각에… 11시쯤 백반 수요를 조사하고 12시 좀 전에 도착한 도시락을 점심시간이 되어서 각자 자리에서 먹는 문화가 생겼다.
정심이네는 회사 근처의 백반집이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 찌개 등 찌개류가 메인이고 매일 달라지는 백반은 그 찌개 중 하나를 골라 대량으로 끓여서 제공하시는 것 같았다. 든든한 흰밥 한 공기에 찌개 한 그릇, 그리고 매일 달라지는 밑반찬이면 하루가 든든하다 못해 졸리다. 그러다 정말 가끔 뼈다귀탕이라는 뼈해장국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나는 지금껏 뼈해장국을 세 번 만난 것 같다.
유명한 제과점 리치몬드가 회사 근처에 있어서 퀄리티 좋은 샌드위치를 늘 가까이할 수 있다. 물론 공주 밤 파이나 레몬 파운드 케이크가 시그니처지만, 사람들이 아침과 점심에 주로 사 가는 샌드위치가 든든하고 괜찮다. 샌드위치 종류도 닭가슴살샌드위치, 치아바타 샌드위치, 햄이나 참치샌드위치 등으로 다양해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저녁 편의점
야근이 잦아지면 편의점 방문 횟수가 늘어난다. 휴식 없이 근무가 이어지면 탕비실에 구비된 과자들을 많이 까먹게 되는데, 이마저도 질릴 때 1층의 편의점, GS성산퍼스트점을 찾게 된다. 보통 찾는 시간대는 오후 3시나 오후 7–8시쯤으로 점심 혹은 저녁 식사 이후 당이 떨어지는 시간이다. 보통은 제로 콜라 같은 탄산음료를 하나 사거나 포켓몬빵을 하나 사 먹는다.
GS성산본점은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다. 야근 후 터덜터덜 돌아가는 골목 초입에 위치한 성산본점에서는 컵라면이나 과자를 하나 사가거나 맥주를 한 캔 사 가기도 한다. 성산본점의 평균 금액이 높은 이유는 가끔의 퇴근 후 맥주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주인분이 기르는 갈색 푸들인 ‘초코’가 어슬렁거릴 때가 있는데, 가끔 계산대 위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기도 한다. 잠시 쓰다듬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법성포 보리굴비 특대 5미 51,000원
5월 가정의 달 선물로 주민 씨와 나는 서로의 부모님께 보리굴비를 선물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냉동 보리굴비를 먹어보라며 챙겨주신 적이 있는데, 그것을 두었다가 나누어 먹었었다. 얼음을 띄운 녹찻물에 고추장과 함께 먹는 보리굴비를 소개해 주니 쫄깃한 감칠맛이 너무 취향에 맞는다며 부모님과 나누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곧 어버이날이기도 하니, 타이밍 맞추어서 택배를 보내보자는 작전을 세웠다. 서로의 본가에 택배를 하나씩 보냈다. 부모님들은 보리굴비를 꺼내 먹은 사진을 공유해 주셨다. 둘이 느낀 좋은 경험을 부모님들
에게까지 넓혔던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