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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가계부 : 다음에 잘하기

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by 모초록

1박 2일 속초 여행

230,000


가족 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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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쁜 일도 액땜이다 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같다. 12월은 즐거웠던 만큼 슬프거나 바쁘거나 아픈 일이 번갈아 가며 생겼다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다 액땜이다, 내년에 좋은 일 있을 거다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정말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 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 반이 뒤섞였다.


사실 해가 바뀐다고 해도 하늘이 노래지지도 않고 해가 서쪽에서 뜨지도 않고 무엇보다 내가 엄청나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새해를 앞두고 있다고 마치 그 전에 있는 좋지 않은 일들이 사라질 것처럼, 오히려 그 일들이 좋은 일을 가져다주는 돋움판이 될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게 웃기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 달을 보냈다.


2일 | 병원 46,000원

12월-03.jpg 병원 지출

12월의 1영업일부터 저녁 먹고 집 가는 길에 시원하게 에스컬레이터에서 엎어졌다. 이마, 인중, 무릎에 차례로 상처가 났다. 너무 오랜만에 크게 다친 거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탓할 사람도 없었다. 얼마나 다친 건지 가늠이 안 가서 잠깐 119를 부를지 고민하다 말았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강남역에서는 제대로 된 진료를 봐주는 병원을 찾기가 힘들다. 대부분 라식 수술, 피부 시술 같은 병원뿐이라 그렇다. 걸어서 20분은 가야 있는 피부과에서 소독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똑같은 말을 5번 정도씩 하시는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분은 생각보다 내 상처를 보고 놀라지 않으셨고 그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총 3회 가서 소독을 하고 일주일 항생제를 먹었다. 데스크에 계신 중년 여성분은 카드를 돌려줄 때마다 킷캣 초콜릿을 두 개씩 주시면서 ‘얼른 나으세요’라고 해주셨는데 그 말을 들을 땐 꼭 진짜 얼른 나을 것 같았다. 그분의 핸드폰에는 ‘영생은 언제나 당신의 현장이다’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방점이 영생에 있는지 현장에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눈 안 다쳐서, 이빨이 안 나가서, 다리 안 부러져서 다행이라는 말을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한동안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점심, 저녁을 혼자 먹는 일이 심심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것도 힘들었다.


14–15일 | 속초 여행 690,000원/3

친구들이랑 속초 여행을 갔다. 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아주 예뻤다. 동그랗고 하얗다. 올해의 마지막 보름달이라고 했다. 끝이 있으면 뭐든 더 소중해지는 건 왜일까. 리조트에 가는 길에 바다와 달이 잘 보이는 곳에서 잠깐 산책했다.


모둠회를 먹고 튀김을 포장해서 돌아와서 와인이랑 먹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귀여운 양말이랑 비비안웨스트우드 손수건, 룸스프레이를 받고 또 트리 오너먼트랑 블러셔를 선물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가랜드를 끼우면서 투덕거리는 친구들을 볼 때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산책로를 걸었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래서 어딜 봐도 좋다는 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친구 어머님이 재밌게 놀고 오라며 쿨하게 20만 원을 송금해 주셨다.26 감사한 마음으로 청초수 물회에서 먹고 싶은 걸 전부 시켜 먹었다.


속초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올해의 행복했던 순간 말하기 게임을 했다. 돌아가면서 올해 행복했던 일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는 거다. 여덟 바퀴 정도 돌았을 때는 생각해 보면 ‘올해도 참 좋았던 일이 많았어’라고 소리 내서 말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고 짧은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하늘의 색이 노란색으로, 분홍색으로, 보라색에서 다시 진청색으로 변해갔다. 천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오래오래 구경하고 휴게소에서는 소떡소떡에 떡볶이를 먹었다. 좋은 송년회 여행이었다.


15–16일 | 가평 여행 750,000원/3

가평 아난티에 놀러 갔다. 양쪽 방이 완벽하게 대칭인 점과 주황색 벽지가 포인트가 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룸서비스로 해물 떡볶이랑 닭다리살 튀김을 시켜서 뱅쇼랑 백화수복을 데워서 같이 먹었다. 졸린 눈으로 테라스에서 경치 보며 마시는 커피가 좋았다.


19일 | 이자카야 95,000원

아프고 바빴는데 속상한 일27 도 생겨서 더 이상 힘낼 힘이 없었다. 오랜만에 남 앞에서 오래 울었다. 사람은 참 이상하게 달래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오래 울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기가 심하게 와서 몸도 마음도 난리였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기약이나 레모나를 자리에 두고 가거나 피스타치오 초코 빵 같은 걸 사줬다. 인생을 정리해 줄 수는 없으니 줄이라도 정리해 주겠다며 짱구 케이블 연결선을 선물 받기도 했다.28

야근 전에 짬을 내서 저녁도 사주고 술도 사줬다. 그러고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친구를 불러서 과메기에 소주를 마셨다. 늦은 시간에 집 앞까지 와준 마음이 고마워서 1차는 내가 샀다. 그런 마음들로 속상한 일을 흘려보내려고 했다.


21일 | 가족 송년회 0원

가족들이랑 놀러 가기로 한 날 타이밍 좋게 눈이 많이 왔다. 어딜 봐도 겨울왕국 같았다. 설경을 배경으로 소고기를 구워서 표고버섯이랑 관자에 같이 먹었다. 오래전 가족 여행으로 장흥에 갔을 때 먹은 이후로 즐겨 먹는 조합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일렬로 누워서 잠을 잤다. 아주 어렸을 때 거실에만 에어컨을 틀어 두고

같이 자던 여름밤이 떠올랐다.


24–25일 | 크리스마스 파티 120,000원

늘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는 친구들이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올해는 직접 요리해 먹기로 해서 감바스랑 팽이버섯 베이컨말이를 만들었다. 모차렐라 치즈로 눈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샤인 머스캣이랑 방울토마토 위에 올리니 나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


엄마가 케이크를 사 먹으라며 5만 원 용돈을 줬는데, 친구가 언젠가 내가 예쁘다고 했던 케이크를 서프라이즈로 사 와서 장 보는 데에 보탰다. 친구들이 좋아할 법한 와인을 한 병 사 갔고 여태껏 마신 와인 중에 제일 맛있다는 평을 들어서 뿌듯했다. 함께하는 날들을 보내고 나서야 제대로 24년을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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