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 (건축사사무소) 퇴사 후 미래계획자, 여, 27세
평균연령 28.8세 5인의 2024년 월별 가계부 연재를 마칩니다.
어쩌면 모두가 하는 소비인 커피에 대한 글 5편을 순서대로 연재한 후 마무리하겠습니다
언제든 궁금하신 점이나 소비에 대해 공유해주실 내용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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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커피 라떼 2잔
엄마의 드립 커피에서는 쓴맛도 신맛도 아닌 무거운 맛이 났다. 몇 모금 마시지 않아도 하루를 잘 살아야 할 것만 같은, 비유하자면 기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 커피 향기가 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오랜 생활로 복작해진 집에도 생명력이 생기는 듯했다.
광화문 디타워 펠트커피에서 첫 원두를 샀다. 코로나 시절 기숙사에서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터널을 하나 지나면 광화문에 도착했다.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크고 정돈된 건물에서 나만 알 것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카페가 있었다. 멋 부린 사람들과 퇴근한 직장인들이 마루 같은 테이블에 자유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혼자서는 안 자리에 둘이서는 바깥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는데 미술관 카페 같은 느낌과 화장실이 정말 좋았다. 특이하게도 유리 벽 안쪽 매장과는 달리 마루 테이블은 코로나 지침이 적용되지 않아 사람들이 적당히 앉아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자주 와서 파란색 패키지 커피만 마시니 낯이 익은 직원분이 집에서 내려 먹어보라며, 1번 내릴 양만큼의 원두를 담아주셨다. 이후 내 돈으로 처음 원두를 샀다. 아침에 커피를 내려 1인실 기숙사에서 온갖 비대면 수업을 들으며 저녁까지 마시던 때가 있었다.
카페에 가서 내 존재를 노출시키고 작은 머리속을 완벽한 타인의 소음들로 채우면, 작은 소리들은 조용해지고 눈앞의 일에 집중이 된다. 그게 일기든 계획이든 공부든 글이든 생각 정리든. 마주 앉은 사람과의 대화에도 더 집중할 수 있다. 자주 보는 사람과 카페에 가면, 특히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평소와 다른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커피를 커피로 즐기게 된 건 내가 보다 안정적일 때. 지난 주말에는 집에서 마실 커피가 떨어져서 마켓컬리로 헬카페 드립백을 주문했다. 주말 아침 어딘가에 가지 않고 계란후라이 호두 감자 식빵과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하루를 다 산 것 같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찾게 된 기점이 분명히 생각난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커피만 마시던 나는 2022년 12월 공사가 덜 끝난 회사로 출근했는데, 창호 발주가 잘못 나가 비어 있는 창문을 재활용 비닐을 길게 찢어 테이프로 막아 사용했었다. 5분이면 물이 식는 사무실에서 1달가량 일하며 뜨아의 맛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3번 이상 한 사람과 뜨거운 라떼를 마신다. 소장님, 실장님, 대리 1, 사원 1로 이루어진 회사에서 대리와 사원이 늘 같이 커피를 마시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점심시간은 1시간. 11시 30분에 회사에서 나가 점심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하고 먹고 나와서 카페에 간다. 이전에는 30분 만에 점심을 먹는다는게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는 어떤 챌린지처럼 밥을 먹고 12시면 넉넉, 11시 55분이면 꽤 행복, 12시 5분이면 아슬아슬한 감정이 든다.
너희 둘이 있어도 말을 안하냐.
우리의 커피타임을 타임랩스로 기록해 보여드리고 싶을 만큼 정말 우리는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침묵이 힘들지 않던 사수와의 커피는 길어야 25분 보통은 20분, 이제 꽤나 소중한 루틴이다. 유난히 힘든 오전을 보낸 날엔 15분 동안 침묵하다가, 연호 씨도 그랬어요? 나 깊은 한숨 같은 신호로 5분간의 하소연이 시작되는데. 그 5분에 라떼 6천 원은 지급할 만했다. 차례로 나누어 계산해서 늘 12,000원이 찍혔다. 처음엔 적당한 질문과 대답을 고르느라 시간을 들였는데 6개월쯤 되니 서로의 얘기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