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 저축은 안 하는 만 서른 기획자, 남, 30세
테슬라 모델3 6일 렌트 비용
제주 도사님 점괘 비용
회사에 셧다운이라는 제도가 있다. 매년 연차 소진 없이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쉰다.
2022년부터 연말 셧다운 기간에 여행을 다녀보고 있다. 2022년엔 도쿄를, 2023년엔 오사카와 교토를 다녀왔었다. 타지에서 한 해의 마지막 일몰과 새해의 첫 일출을 보는 경험이 좋았다.
올해는 제주도를 다녀왔다. 올해 크고 작은 여행이 잦았기에 그런지, 12월 여행지는 자연스럽게 고민과 준비 없이 다닐 수 있는 여행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고민을 안 할 수 있는 여행지는 아무래도 국내가 적절하다. 오랜만의 제주였다. 누워 있다가, 운전하다가, 밥 먹고 카페 가고 물어물어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브로드컬리 매거진』 6,300원
비행기에서 제주도 갈 때 읽어보려고 구매한 『브로드컬리 매거진』 제주편을 읽었다. 책에 소개된 가게들을 검색해 보니 아직까지 운영하는 곳은 몇 없었다.
렌터카 — 테슬라 모델3 6일 렌트비 417,200원
전기차를 렌트해 보고 싶었다.9 궁금했던 테슬라를 렌트해 보았다. 모델3를 빌렸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기존 자동차들이 추구해 온 승차감 등의 물리적인 편안함과는 또 다른 문법인, 소프트웨어가 제공해 주는 — 스마트폰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방식의 — 편안함을 자동차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물리적인 편안함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노면의 진동과 고속으로 달릴 때의 소음에 대한 버퍼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차량 외장의 마감과 파츠들의 연결부에 대한 디테일도 아쉬웠다. 엔트리급 차량이라 그런가? 연식이 있는 모델이라 그런가? 어쨌든 전기자동차라는 제품은 전반적으로 하드웨어의 ‘편안함’과 소프트웨어의 ‘편리함’ 사이의 밸런스를 잡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자동차를 디바이스로 바라본다는 관점은 혁신임이
틀림없었다.
포도호텔 — 2박 1,184,000원
가보고 싶었던 포도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건물이 편안하고 좋았다. 많은 생각이 들어간 건물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건물의 규모와는 상관없는 개념이었다.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건축 투어도 참여했다. 설명을 들으니 유익하고 좋았다. 이타미 준의 건물은 편안함 뒤에 많은 생각들이 숨겨져 있어서, 설명과 함께 관람하면 그 감상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 같다.
다양한 재료들을 이어 붙여나가는 방식, 직관적이며 논리적인 호텔 구성, ‘그래, 제주는 단층이 맞지’ 라고 절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호젓한 경치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가 주는 여운이 숙박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이어졌다.
첫째 날 오후엔 사진을 한참 찍었다. 양실에 묵었는데, 각도 조절이 가능한 루버 일체형 슬라이딩 도어를 이리저리 연출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객실의 구석구석을 발견해 나갔다.
둘째 날 밤엔 목욕을 하고 영화 〈캐롤〉을 봤다. 연말에 잘 어울리는 영화들이 참 많은데, 이날은 〈캐롤〉을 골랐다. 크리스마스 뉴욕을 배경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영화다. 영상과 음악이 참 좋은 영화다.
섭지국밥 몸국 10,000원
지난번 제주에 왔을 때 가봤던 고사리 해장국집이 크리스마스 다음 날 폐업한다는 소식을 네이버 지도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폐업 전에 방문하지 못했다. 섭지코지 근처 해장국집에서 처음으로 몸국을 먹어봤다. 해조류 베이스의 육수에 풀드 포크 느낌의 고기가 함께 들어있던 국밥이었다. 전복 내장처럼 진하면서도 미역의 뉘앙스도 있고, 고기까지 함께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속도 편했다.
명리동 식당 자투리 고기 58,000원
도민들에게 유명한 고깃집에 가봤다. 자투리 고기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신선한 고기를 직접 구워주시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식당 분위기가 좋았다. 크지 않은 식당엔, 관광객보다는 주민들이 더 많아 보였다. 가족들이 함께 방문해서 동그란 연탄불 테이블 두 개로 나눠 앉아 먹는 게 아름다워 보였다. 사장님이 고기를 구워주시며 중간중간 휴대폰으로 보여주시는 이연복 셰프 및 명량의 김명민 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들, 고기 다 먹고 온천 가자는 옆 테이블의 대화, 어른들의 의자와 기분 좋게 섞여 있는 유아용 의자들이 아름다웠다. 비간 감독이 본인의 고향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카일리 블루스〉가 생각났다. 내 고향에서, 내 가족들을 배우로, 연출이 아닌 실제 환경을 배경으로 작업에 임한다는 건 촬영보다는 기록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카페
새로 가봤던 멋진 카페들. 제주도 빈티지 숍 사장님이 제주 최애 카페라며 추천해 주셨던 디사이드온의 드립 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컵홀더에 두고 3일에 걸쳐 홀짝이며 마셨다. 여행 마지막 날 방문했던 하소로 커피에서는 1월 출장 때 먹으려고 커피 티백을 사 왔다.
미술관
이타미 준 미술관과 김창열 미술관을 관람했다. 이타미 준의 건축 언어들을 그의 딸 유이화 건축가가 온전히 구현해 놓은 건물이었다. 다양한 심상을 느낄 수 있었던 밀도 있는 곳이었다. 곧바로 방문한 김창열 미술관에서 김창열 작가의 다양한 작업들을 타임라인 순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그니처가 된 물방울까지 도달하게 된 과정, 물방울을 그리는 다양한 방식들을 볼 수 있었다. 스프레이 기법으로 그렸던 1970년대 초반의 물방울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점 50,000원
제주가 고향인 분으로부터 제주의 유명한 도사님에 대한 정보를 듣고 찾아가 보았다. 홍상수 감독을 닮은 할아버지께서 점을 봐주셨다. 재밌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동생 덕을 많이 볼 거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과도 점 본 얘기를 하면서 많이 웃었다. 많이 웃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값진 소비였을 수도 있겠다.
『꼬마 니콜라』 5종 세트 중고 책 17,000원
포도호텔 다음에 묵었던 에어비앤비 숙소에 김저니 작가의『갑자기 어른』 이라는 제목의 책이 비치되어 있어서, 카페에 갈 때 챙겨가서 읽었다. 요새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하다 보니, 책을 볼 때 몇 쇄까지 찍었는지를 보게 된다. 『갑자기 어른』에는 4쇄라고 적혀있었다.
편한 글과 그에 맞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함께 구성된 책이었다. 카페에서 다 읽었다. 그림들을 보다가 어릴 적 좋아했었던 『꼬마 니콜라』가 떠올랐다. 『꼬마 니콜라』 또한 개성 있는 그림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정사각형 비례의 책 디자인도…. YES24에서 중고로『꼬마 니콜라』 5권 세트를 본가로 주문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TV 채널을 돌리다가 OCN에서 상영 중이던〈나 홀로 집에 2〉를 시청했다. 〈캐롤〉 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최고의 클래식.
다음 영화로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