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가을 놀이: 방어회, 전어구이, 잠봉뵈르, 아인슈페너
주스티노스 5년산 와인
날씨가 쌀쌀해지면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후회만 중얼대는 나쁜 버릇이 있다. 너무 많은 것에 신경 쓰고 있나 싶을 때와, 너무 많은 것을 귀찮아하나 싶을 때가 번갈아 찾아왔다. 전자와 후자의 내가 모두 별로였다. 스스로가 지겨워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같은 걸 고민하며 한 달을 보냈다. 변할 수 없으면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이라는 친구의 말도 오래 생각했다.
가끔은 인생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게 비상식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면 스쿠터 타다가 생긴 무릎 흉터를 볼 때.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생각할 때. 그럴 땐 꼭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과학 시간에 배운 단백질의 비가역성이 생각난다. 계란은 가열하고 나면 다시는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래서 더 초조하다. 되도록 잘하고 싶어서, 뭐든 간에 돌릴 수도 없는 걸 돌리고 싶어지기 싫어서. 순간순간이 너무 잠깐이라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겨울이 와있고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짧아진 해와 추워진 날씨가 미워질 때마다 작년 삿포로 여행 사진을 봤다. 그러면 올해 겨울이랑은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다.
2일 | 대전 와인 엑스포 약 200,000원
서울 주류박람회에 못 간 게 아쉬워 대전 와인 엑스포에 갔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마시려고 산타 모자를 쓴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맥주를, 겨울 가평 여행에 가져가려고 데워 먹으면 더 맛있는 뱅쇼를 샀다. 어쩐지 겨울잠 자기 전에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든든하게 겨울을 준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태평소국밥이랑 신가네 매운 떡볶이 같은 그리웠던 대전 음식도 많이 먹었다. 대전은 희한하게 자전거 도로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차도가 많다. 가로수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택시로 대전역으로 가는 길에는 노래도 듣지 않고 핸드폰도 보지 않고 바깥만 바라보았는데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 있었다.
9일 | 김두루미 콘서트 99,000원, 와인 50,000원
인디 밴드 가수들이 나오는 김두루미 콘서트에 갔다. ‘안전 음주 안전 관람’이라는 A4가 군데군데 붙여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안전하고 즐겁게 뛰어놀았다.
10일 | 가을 놀이 약 100,000원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지희랑 수빈이랑 방어를 먹으러 갔다. 다 먹고도 성에 차지 않아서 전어구이를 시켰는데 사장님이 전어구이는 젓가락으로 발라먹는 게 아니라 양손으로 들고 먹는 거라고 알려주셨다. 양손으로 생선을 들고 뜯어 먹는 친구들이 어쩐지 조금 귀여워 보였다.
창덕궁에서 정독도서관까지, 감고당길에서 경복궁역까지, 경복궁역에서 다시 청와대 삼청동까지 걸었다. 걷는 내내 단풍을 보고 또 봤다. 은행나무는 샛노랬고 하늘은 새파랬다. 벤치나 빈백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즐거웠다. 그 사이에 껴서 정독도서관에서는 잠봉뵈르를, 삼청동에서는 카페 아키비스트 아인슈페너를 차례로 나눠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확인한 아이폰 즐겨찾기 사진에는 내 사진보다 친구들을 찍은 사진이 더 많았고 새삼 사진을 찍고 또 들여다보는 일에는 애정이 많이 담긴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너무 즐거워서 조금씩 집 가는 시간을 늦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택시비로 3만 원을 썼다.
14일 | 동기 저녁 모임 케이크 30,000원
언제부턴가 동기들의 생일 앞뒤에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이 당연해 졌다는 사실이 좋았다. 야근하느라 2시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2차로 간 맥주집에는 ‘잔은 비우고/마음은 채우고/사랑은 나누고’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려있었다. 설탕토마토를 시키면 토마토가 그려진 그릇에 설탕을 아낌없이 뿌려주는 곳이었다. 캐치프레이즈 그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갔다. 1차는 주인공이, 2차는 최근 투자로 이익을 본 동기가 사줘서 케이크값만 내가 지불했다.
15일·22일·25일 | 와인 선물 39,000원×3=117,000원
각기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와인 3병(주스티노스 5년 산)을 선물했다. 술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이 와인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무난했고, 회사 밑 와인 샵에서 팔아서 접근성도 좋았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 선물로 제격이었다. 하나는 집들이하는 선배에게,
하나는 오랜만에 보는 제주도 사장님께, 하나는 이직하게 된 동기에게 선물하며 선물은 늘 시작과 끝, 또 만남과 헤어짐의 선상 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16일 | 〈언리미티드 에디션〉 LP 74,000원, 책 15,000원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과소비한 기억이 있어 이번엔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 아니면 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갔다. 책에서는 성공했는데, 지나가다 발견한 〈헤어질 결심〉 LP는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해일 배우와 탕웨이 배우의 얼굴이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묘한 색깔로 그려져 있었다. 구매했다. 몇 바퀴 돌다가 다시 그 자리에 갔는데 이번엔 〈벌새〉 LP가 놓여있었다. 다시는 이 부스 쪽으로 걸음을 향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다.
소란스러운 마음과 다르게 햇볕이 예쁘게 내리쬐는 가을의 끝자락이었고, 연호 언니랑 닭 한 마리를 먹다 다 먹어 갈 때쯤 맥주를 시켰다.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온 도서전의 유어마인드 부스에서『 긴 강아지의 여정』이라는 미니북을 봤다. 「흘러가다 보면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 믿는 긴 강아지」 페이지가 인상 깊었고 나에게도 긴 강아지에게도 재밌는 일이 생기길 빌었다.
21일 | 엄마 취업 축하 꽃다발 15,000원
꽁꽁 얼어붙은 취업난에 엄마가 취업을 하셨다. 나는 일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일을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시키는 일을 ‘이슈’ 없이 처리하는 게 일의 전부인 나에게 지속해서 좋아하는 일을 시도하는 엄마의 모습은 반성의 거울이자 자랑 같은 거다.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퇴근길에 강남 지하상가에서 꽃을 샀다. 들고 가는 내내 즐거워서 꽃은 선물하는 사람이 더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라 생각했다. 꽃집에서 화병에 물 담을 때 같이 넣으라며 보존제를 주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꽃이 시들지 않아서 잠깐 조화인가? 의심했다.
22–24일 | 제주도 여행 470,000원
제주도에 갈 때마다 찾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올레길 걷기 캠프를 한다길래 신청했다. 비행기 예약을 미루다 가기 사흘 전에 예약하려 보니까 한 대도 없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해외 하늘길이 열리면서 제주행 항공편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운 좋게 선배가 알려준 사이트에서 새로고침을 5번 하고 나서야 표를 구해서 갈 수 있었다.
첫날에는 주어진 문답지에 답을 쓰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 잎 클로버 위에 사랑하는 일상을 적어보세요’라는 질문에 ‘출근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갖는 커피 타임’, ‘운동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의 뿌듯함’, ‘점심 먹고 하는 산책’, ‘알람 없이 깨는 주말 아침’, ‘출근길 지하철 자리 맡아주려 뛰어가는 아빠의 뒷모습’ 같은 걸 쓰고 읽으며 생각보다 지금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엔 올레길 18코스를 걸었다. 걷는 동안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산, 바다, 사람만 생각했고 약간의 명상처럼 느껴졌다. 늘 이 정도의 발치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지막 날엔 야심 차게 일출을 보겠다며 서우봉을 올랐으나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볼 수 없었다. 대신 밝아지는 하늘에 합성해 준 해가 둥둥 떠 있는 사진을 보고 많이 웃었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커피도 마시고 웃기도 많이 웃으면서 정말이지 겨울이 더디게 오는 가을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