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4박 5일 사이판 여행
1박 2일 경주 여행
이상하게 매년 10월에는 여행을 많이 가게 됐다. 추워지는 날씨가 싫어서 일수도, 얼마 남지 않은 올해에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주말 내내 속초, 경주, 서울을 돌아다녔다. 싸돌아 다녔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주말을 제외하고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다양하게 즐겁게 보냈다. 너무
즐거워서 언젠가 이런 시간이 사라질까 두렵기도 했다. 지금처럼 더 오래 좋아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마음과 더 무던하고 스스로 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4–9일 | 사이판 여행 1,550,000원
소희랑 사이판에 갔다. 최근까지도 같이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는데, 사이판 가는 비행기에서 막상 세어보니 18년 유럽 여행 이후 5년 만에 같이 가는 여행이었다. 어떤 익숙함은 벌어진 시간도 메워준다고 생각했다.
사이판의 좋은 점은 특별하게 꼭 해야 할 것, 먹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거다. 둘 다 일에 지친 상태로 떠났던 여행이라 그냥 잘 먹고 잘 쉬었다. 아침이면 조식 샐러드를 다섯 그릇씩 갖다 두고 먹었고 점심에는 근처에서 팟타이, 피자, 타코 등을 먹었다. 저녁에는 생참치회에 라임 소주, 부순 컵라면에 진을 질릴 때까지 타 마셨다. 그 사이 사이의 시간에는 수영장에서, 동굴에서,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선베드에서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자고 호텔 로비에서 흑백요리사를 봤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음 여행지를 꿈꾸는 시간이 즐거웠다.
10일 | 포스트잇 0원
회사 선배 청첩장 모임을 갖는 중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탔다는 소식을 들었냐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확인한 글방 카카오톡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벨상 소식도, 그 사실을 전화나 카카오톡으로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좋아서 마음이 벅차올랐고 오랜만에 타인의 행복에 기뻐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언어를 곧이곧대로 재해석 할 수 있음이 그걸 동시대의 동 지역의 사람과 나눌 수 있음이 행운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동안 한강 작가 책을 빌려주고 대여비로 받았던 포스트잇을 한 장씩 읽어봤다. 엄마 친구분께서 『흰』을 빌려 읽고 써주신 포스트잇에는 ‘유정 씨의 20대가, 내가 생각하는 하얀 웃음으로 가득한 나날이길….’ 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18–19일 | 속초 여행 250,000원
속초 여행은 가기 전부터 다사다난했는데 약속한 시각에 아무도 퇴근을 못해서 버스를 놓칠 뻔했다. 혹시 몰라서 다음 버스를 찾아보았는데 아무래도 금요일 퇴근 시간대에는 남아있는 버스가 있을 리 없었고 놓치면 끝이라는 마음으로 회사부터 출발하는 버스까지 계속 뛰었다. 뛰는 와중에도 업무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속초까지는 버스로 3시간이나 걸렸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져 있었다. 가려고 봐둔 식당도 이미 라스트 오더가 지나고 나서였다. 그런데도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마음대로 놀았다. 열려있는 수산시장에서 소방어를 먹고 튀김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었다. 리조트 글램핑장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캔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다음 날도 비가 계속 와서 오션뷰도 제대로 못 즐기고 누군가 킥이라던 산책로도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쉽거나 속상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쉬운 마음은 곧 영업을 종료한다는 라이픈 커피에 갔을 때 느꼈다. 커피도 공간도 정갈하고 차분한 곳이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을 더 먼저 알았으면 속초에 더 자주 왔겠다고 생각했다. 창밖의 감나무를 구경하면서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오고 가는 길에 탄 택시에서 기사님이 속초 맛집을 정리해 둔 쪽지를 주셨다. 쪽지 하단에는 ‘한국 축구 K리그를 사랑해 주십시오’ 와 ‘좋은 직장 때문이 아니고, 출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과 좋은 마음, 그리고 지금 내 마음에 대해 차례로 떠올렸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창밖을 구경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는데 커튼 새로 보이는 산들이 울긋불긋해지고 있었다. 유난히도 길고 지난했던 여름이 갔다는 마음이 들었다. 집에 와서는 딱 한 개만 먹겠다던 만석 닭강정을 반 이상 먹고 잤다.
26–27일 | 경주 여행 290,000원
회사 동기들이랑 경주에 갔다. 가을 경주는 처음이었는데 지금껏 본 경주 중에 제일 아름다웠다. 어제까지 강남역에서 수많은 인파 사이를 휘적휘적 걷다가 조용한 거리를 차 타고 달리면서 가을 발라드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다 같이 조금 센티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우습게 황리단길의 교통 체증은 어마어마했고, 주차 자리 눈치싸움도 꽤 힘겨웠지만.
어쩐지 분홍색보다 핑크빛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하늘과 핑크뮬리로 둘러싸인 첨성대, 이제는 고개를 조금 숙인 해바라기, 은은하게 반짝반짝한 동궁과 월지 앞에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찍어주며 킥킥댔다. 저녁에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슈퍼 아주머니가 이게 더 맛있을 거라며 서비스로 주신 갈빗살이 말씀대로 맛있었다. 찰보리빵에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얹고 쫀디기를 구워서 먹으면서 눈이 감길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가을 경주도 가을 경주지만 노을을 등지고 같은 각도로 허리를 젖히고 웃는 사람들, 먹어도 먹어도 계속 늘어나는 10원 빵 치즈, 설거지를 걸고 하는 가위바위보 내기 등이 마음에 더 오래 남았다. 예전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디서도 잘 지내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냥 옆에 있는 사람들이랑 있는 곳에서 잘 지내는 시간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그런 마음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지금보다는 한 오만 배 정도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들도 다 욕심임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