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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가계부 : 멈춘 시계

A : (건축사사무소) 퇴사 후 미래계획자, 여, 27세

by 모초록

인천-도쿄 왕복 항공권

286,100


눈물의 온우동

14,000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혼자서 카페에 왔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집에서 기다린 건 애인이었을까, 다른 무엇이었을까? 연둣빛이 가득하던 2층 카페에 빨간빛이 든다. 다만 가을이 늦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지나갔다는 신호 같다.


둘이 있는 집에서도 혼자가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곧 혼자가 된다. 그러면 피아노, 클래식, 가을 음악 같은 영상을 틀어 두고 아침 시간을 보낸다. 점심시간쯤엔 유난한 브이로그의 별일 없는 생태계를 확인하거나 최근 나온 드라마를 섭렵한다. 가끔은 아주 혼자서 기쁘면서 청승맞아진다. 마음이 다친 금쪽이, 처음 심부름하는 아이, 다비치의 차밥열끼 영상을 보다가 ‘천천히~’ 하는 공연 장면에서 눈물이 나는 식이다. 그러다 가끔 지난 생각들이 떠오르면 음식을 소화하듯 몸을 움직인다. 몸을 덜 움직였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어느 날 테니스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없이 걸었다. 우리는 자주 말없이 걷지만 특히나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가끔 궁금했다. 어떻게 나를 믿는지. 1달 남짓 백수였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사라졌다는 게 우스웠다. 특별히 질문하지 않는 마음이 너무 크고 고마웠다. 다른 날 설거지를 하다가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모르겠어 라는 말 중 가장 신뢰하는 말이 “모르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내가 가장 분명히 이해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는 말에도,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도 똑 부러지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쉬는 동안의 동네 생활이 좋았다. 컴퓨터 책상 옆 창문을 열면 어린이집 소리가 들렸다. 어린이집은 아침 6시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1시쯤 노랫소리도, 2시쯤 울음소리도 들렸다. 시장의 활력이 아직도 신기했고 어느 시간대나 붐비는 인파가 질려버리는 순간이 더 천천히 오길 바랐다. 비닐봉지에 채식주의자를 들고 가시던 아저씨, 오전 10시 테라로사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내고 김 나는 커피를 드시던 베레모 할아버지. 유모차를 끈 젊은 엄마들, 손잡고 걷는 사람들, 크고 작은 강아지들, 점심에만 먹을 수 있는 만둣집, 생맥주가 제일 맛있는 다코야키 집. 아이스크림이 빨리 녹아 버리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날에 무려 3000원짜리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들고 한강까지 걷는 저녁까지 좋았다.


4박 5일의 일본 여행도 있었다. 갑자기 정해진 하성이의 도쿄 출장에 나도 홀린 듯이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 3일 전 숙소를 모두 예약했다. 돈을 아껴 가는 첫 도쿄 여행인 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행 전날까지 유튜브를 많이 찾아봤다. 여행이 전부인 듯이, 이후의 삶은 없는 듯이 애썼다. 일본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기차에 앉으니 비로소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아야지, 그리고 너무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혼자일 줄 알았던 여행 첫날 요코하마에서 하성이와 동료분을 만났다. 요코하마는 도쿄 우에노역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인데,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건축물인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이 있는 도시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너무 좋아하는 장소는 바쁜 마음으로 방문하고 싶지 않아 도리어 망설여졌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했지만, 일정이 맞아 결국 함께 구경하게 되었다. 도시는 꽤 컸고 모토마치 지역의 근대 저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언덕 위 성당과 저택들과 정돈된 도로와 외국인 묘지를 거닐며 한국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시간이었다. 혼자였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시간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나무 데크가 넓게 펼쳐져서 자연스러운 굴곡을 만드는 바다 위 공원 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조리갯값을 잘못 조정한 듯이, 밝은 조명도 없는 데크 위에서는 마침 정박해 있던 페리만 잘 보일 뿐이었다. 야간촬영이 잘 안되는 건 카메라가 구식이기 때문이고, 아이폰 사진 빛이 번져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원망스러운 마음은 방향을 몰랐다. 함께하는 여행은 시간을 나눠 쓰는 것이다. 시간 탓인지, 카메라 탓인지, 나를 향한 원망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스스로 조금 어이가 없어질 즘, 도리어 순수한 감정에 감사했다. 순수한 동경과 영감을 조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터미널은 함께 있던 페리 덕분에 더 멋져 보였을지도 몰랐다. 아카렌가 창고에서 탄탄면에 생맥주를 먹고, 차이나타운에서 마파두부와 콜라를 먹고, 역으로 돌아가다가 꼬치에 생맥주를 마셨다. 다음 날 둘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오늘도 요코하마에 가자고 물어봐 주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행지에서는 유독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마련인데, 어릴 적 아버지가 써주신 편지에 ‘한국을 바꿀 여성이 되어라’는 문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성이는 그냥 동선을 잘 짰을 뿐인데도 내가 정말 세상을 바꿀 거라고 했다. 다음 날 10월 중순 30도를 기록하는 도쿄의 날씨에 건축물 3곳을 돌고 들어간 식당에서 주문한 냉우동 대신 온우동이 나왔을 때, 그 여성은 눈물 콧물을 흘렸다. 하성이가 여행 중 자주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리듬에 맞춰 조금씩 부담을 내려놓으려고 애썼다. 포장한 텐동이 모두 눅눅해졌더라도 다음날까지 맛있었다. 기대 없이 방문한 근처의 돈가스집에서 진짜 돈가스를 먹었다. 뉴진스가 왔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책 편집 회의를 하고, 동아리 사람들과 동기들을 만났다. 이제 멈춘 시계를 돌려보아야지. 2025년까지 2칸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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