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 저축은 안 하는 만 서른 기획자, 남, 30세
회사 탕비실 커피
헬카페 블랜드
준비물
기호식품이라는 말이 참 귀엽다.
커피는 기호식품 중 단연 가장 보편적인 메뉴다.
어디서든 팔고, 언제든 마실 수 있다.
어떻게 사고, 어떻게 마시는지가 각자의 기호가 된다.
나에게 커피는 준비물 같은 것이다.
하루를 위한 준비물, 야근을 위한 준비물,
대화를 위한 준비물, 생각을 위한 준비물.
준비물이라는 말도 정말 귀엽다.
오늘도 좋은 준비물을 챙겨가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좋은 카페에 간다.
좋은 연필을 쓰면 괜히 글도 잘 써지고, 시험도 잘 볼 것만 같다.
가장 아끼는 카페에 가고, 오늘에 어울리는 원두를 고르는 마음가짐은
어쩌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주중 오전
회사 커피. 티백이나 핸드드립(무료, 탕비실에 구비)
출근 후, 탕비실에 구비된 커피 티백을 우려 마시거나, 핸드 드립 도구들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신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핸드드립 도구를 사용해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법을 배웠다. 회사에 구비되어 있는 드립 커피 추출 도구인 케맥스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필터 거치대가 커피가 담기는 병과 일체화 된 유리 플라스크 형태의 도구이다. 모래시계처럼 생겼다. 원뿔 형태의 필터 거치대라서, 원뿔 형태로 접히는 방식의 케맥스 전용 필터도 따로 판매된다. 세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내세우고 싶은 장점과 성과, 뚜렷한 형태적 특징이 돋보인다. 상품군 구성도 매력적인데, 용량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플라스크가 있으며,
수작업으로 유리 플라스크를 만드는 핸드블로운 라인과 기계로 만드는 라인이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케맥스를 통해 추출 도구를 고르는 일에도 기호가 반영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회사 탕비실엔 커피 티백도 구비되어 있다. 원두를 갈고, 필터를 깔고, 커피 뜸을 들이는 등 약간의 수고와 시간이 걸리는 핸드드립 커피에 반해, 커피 티백은 낱개로 포장되어 있는 티백을 뜯고, 컵에 담고, 정수기로 뜨거운 물을 받기만 하면 완성된다. 맛 또한 훌륭하고, 종류도 세 종류나 있다: 진한 맛, 중간 맛, 디카페인. 각자의 컨디션에 따라 골라 먹는 맛이 있다. 티백의 장점은 원하는 농도만큼 우려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주중 오후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중 두세 곳을 주로 방문한다. 헬카페 아니면 챔프 커피다. 점심 먹고는 주로 아메리카노 혹은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를 마신다. 드립커피를 마시기엔 시간이 모자르다.
헬카페는 두 종류, 챔프커피는 네 종류의 에스프레소 원두 구성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점심메뉴 → 커피메뉴(원두)의 경우의 수를 경험 하면서, 그날 점심 메뉴와 페어링이 맞는 원두를 선택하는 취미가 생겼다. 김치찌개나 팟타이, 비건 카레 등 산미가 있거나 향신료가 가미된 음식을 먹은 뒤엔 산미가 있는 원두를 고르고, 돈가스나 불고기 등 육류 음식을 먹고는 클래식하고 진한 강배전 원두를 고르는 식이다.
점심 커피로 디카페인 커피는 잘 선택하지 않는다. 맛은 너무 좋은데 오후에 잠이 쏟아진다. 이것도 페어링이라고 해야 하나?
일과 중 회사 동료와 대화할 일이 있다거나, 야근 전이나, 야근 다음 날 점심을 먹고는 헬카페에서 블랜드를 시켜 마신다. 블랜드는 헬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로, 융드립 — 면 필터를 사용해 점드립 방식으로 핸드드립한 진하디 진한 커피다. 블랜드를 시킬 땐 커피의 양과 농도에 따라 따듯한 메뉴 기준으로 세 종류의 용량을 정할 수 있다. 보통 가장 많은 양인 120ml를 시킨다. 120ml도 충분히 진하다. 정성스럽게 내려주신 블랜드의 표면을 내려다 보면, 꼭 블랙홀을 보는 것 같다.
씁쓸하고, 진하고, 기분 좋다. 대화하기에 참 좋은 커피고, 마음을 정리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기에 참 좋은 메뉴다. 주말에도 블랜드를 마시러 종종 헬카페를 들리곤 한다.
주말
보통 가는 카페만 가는 것 같다. 친구들이 새로 알려준 카페도 가보고 좋으면 리스트에 추가한다.
본가 근처 베트남 커피 집에 가면 카페 덴다를 진한 맛으로 시킨다. 에스프레소 7 샷 분량의 커피가 단돈 4.800원이다. 드라이브를 시작하거나, 영화관에 갈 때 테이크아웃 해서 가곤 한다.
옆 동네 친구네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오금동커피 본점도 좋다. 일단 아파트 상가가 멋지다. 쾌적한 선큰(sunken)을 바라보는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다채롭게 모여있다. 다양하게 구비 되어있는 원두로 내려 주시는 드립도 훌륭하다. 미국식 커피 소서 위에 합이 맞지 않는 밀크글라스를 올려 내어주시는 점도 위트 있다. 가장 어렵다는 ‘적당함’을 이야기하는 동네 젊은 터줏대감 같은 카페다. 근처에 분점도 몇 개 있다.
대학 친구 동네 근처의 에토라도 좋다. 야밤에 카페를 찾을 때면 어김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코로나 이후, 앤트러사이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카페들의 영업 종료 시간이 당겨진 점이 너무나 아쉬웠는데, 새벽까지 영업하는 에토라는 한 줄기 빛 같았다. 친구 같은 사장님이 셀렉한 다양한 로스터리의 원두로 내려주시는 드립 커피 맛도 일품이다.
생각을 하고 싶을 때면 파주로 간다. 천창을 통해 햇살이 내려오는 카메라타의 테이블 좌석이 생각난다. 텍스트를 듬뿍 챙겨가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