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카페 에슬로우 아메리카노
커피랑 먹는 삼각김밥
직장인의 3대 영양소는 카페인, 알코올, 니코틴이라고 했던가. 먼 나라 남의 얘기 같던 것들은 어느덧 직간접적으로 나의 얘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여느 한국인이 그렇듯 나도 아침에 투 샷 정도는 때려 부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다들 그래서인지 우리 회사는 사내 아침 방송이 끝난 후에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면 룰이다. 처음에는 이런 문화가 좀 낯설고 어려웠다. 언제 윗사람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할지 몰랐고,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30분 동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지도 어려웠다. 해도 되는 얘기와 안 하는게 더 좋은 얘기, 해서는 안 되는 얘기를 입속에서 고르고 골랐다. 처음에는 커피는 너무 필요한데 누가 마시자고 안 하면 알아서 나갈 깡은 없어서 계속 커피를 사 들고 출근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누구는 부지런하다고 했고 선배는 아예 사 오지 말라고 말했다.
“OO아 커피를 맨날 출근길에 사 오는 거야? 사 오지 마. 누가 먹자 하면 먹고 나가서 동기들이랑 마시고 그래. 나도 옛날엔 선배들이 아침마다 커피 마시러 가는 게 진짜 신기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시간이 하루의 낙 같은 거더라고. 그냥 와서 먹어.”
처음엔 이럴 시간에 출근 시간을 30분 늦추면 안 되나 싶었지만, 싶었지만, 지금은 이 말을 백번 천번 이해한다. 이해하는걸 넘어서 모닝 커피 타임을 안 가지면 하루 종일 쳐지는 사람이 됐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 거다. 사실은 커피를 마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침에 잠깐 회사를 나갔다 오는 게 중요하다. 1년이 조금 넘은 이젠 대충 이때쯤이면 누구랑 커피를 마시겠구나 싶기도 하고, 언제 누구랑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지 알아채는 짬도 늘었다.
보통 선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 특히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이거나 전날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면 꼭 다음날은 커피를 사준다. 한 번도 밖으로 말해본 적은 없지만 사실 나는 이 마음이 고맙고 위안도 많이 받았다.
커피는 보통은 회사 앞에 카페거리에서 사고, 춥거나 비 오는 날에는 강남역 지하상가로 간다. 밖이라고 해봤자 회사 코 앞에 카페 거리지만. 거기엔 ‘에슬로우’, ‘텐퍼센트’, ‘옵션’, ‘커피나인’ 같은 스페셜티 커피 프랜차이즈가 줄지어 있고, 그 앞에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랑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묘하게 구분되어 섞여 있다. 나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커피 전문점이 있었는지 회사에 다니고 처음 알았다. 카페마다 분위기도 커피 맛도 묘하게 다르다. 가끔 잘생기거나 예쁜 알바생이 있으면 입소문이 나기도 한다. 에슬로우(아메리카노가 3,500원)의 미남 알바생은 내가 입사하기도 전에 그만뒀다며 어디서 연예인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회사에 또 다른 암묵적인 룰이 있다면, ‘계산은(거의) 선배가 한다.’ 라고 할 수 있다. 선배가 열 번 정도 커피를 사주면 내가 한 번 산다. 그것도 선배보다 빨리 카드를 내밀거나 꽂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년 선배도 선배로 치는 기수제, 수직 그 자체인 직장에서 사원이 갖는 장점 같은 거다. 물론 나도 곧 그런 선배가 되어야겠지만. 받은 만큼 갚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커피를 들곤 회사를 끼고 한 바퀴 돈다. 일 얘기. 부서 돌아가는 얘기. 회사 기조 같은 얘기. 선배의 아들이랑 딸 얘기. 앞으로 있을 연차 얘기. 뭐 그런 얘기들을 한다.
가끔은 어떤 얘기들은 커피 타임을 위해 남겨두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는 부서나 일에 불만이 있어도 절대 말 못 하고 속으로 곱씹는 사원이었고, 그때는 그게 직장인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입사 초반에는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른다는 조언을 정말 많이 들었다. 몇 번 묵혔던 게 터지고 나니까 회사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주는 곳이라는걸 알게 되었고, 말 못 해서 바보가 되는 건 싫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생기면 기억해 뒀다가 커피타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선배한테 은근슬쩍 꺼내는 스킬도 생겼다. 선배는 그런 얘기를 허투루 듣고 넘기는 사람은 아니고, 최근에는 이것도 내 복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선배랑 커피를 안 마시는 날에는 동기들이랑 커피를 사러 간다. 아침 방송이 끝날 쯤이면 ‘커타 고?’, ‘ㅇㅋ’ 1층 같은 메신저를 주고받고 회사 로비에서 만나는 식이다. 전날 술을 마셔서 숙취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건너편 ‘시스커피’ 의 플레인 마 주스를 먹는다.
아침을 못 챙겨 먹어서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강다짐’ 이라는 삼각김밥(3,500원)을 커피랑 먹는다. 커피랑 김밥은 꽤 조합이 좋은 편이다.
선후배 사이에선 선배가 계산하는 게 룰이라면, 동기들이랑 있을 때는 번갈아 가면서 계산하는 게 룰이다. 딱히 누가 몇 번 샀는지 칼같이 계산하는 건 아니지만 이쯤 되면 내가 사야겠다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그래서 아침에 커피숍에서 찍히는 가격들은 늘 2잔 이상의 값이다. 가끔은 그 숫자들이 묘하게 일상에 대한 안정감의 표식처럼 느껴진다. 내일이든 모레든 다음 주든 빠른 시일 내 우리가 또 같이 커피를 마시러 나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