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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소비 : 혼자서 알아서 마시기

E : 의도치 않게 N잡러가 된 대학원생, 남, 30세

by 모초록

드립커피 원두 200g

15,000



백수에게는 커피타임이 없다.

“커피 마실 사람?”

은 사실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사였던 것이다.


커피타임은 직장에서 특정 시간이 빨리 흘러가게 해주기도, 혹은 내가 힘들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 대사를 외침으로써 그 사실을 인지시켜 주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먼저 동료들에게 이 대사를 외쳐서 그 상황에서 잠깐씩이나마 그들을 꺼내주고 환기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 아무도 나에게, 혹은 나도 아무에게도 이 대사를 외칠 기회가 없다.


소비적으로는 커피 비용이 굉장히 줄었다. 가끔 친구를 만나는 상황이 아니면 카페에 갈 일이 거의 없게 됐다. 직장에서는 의도치 않게도 커피를 마실 환경이 많았다. 오전에 너무 피곤해서 한잔했는데 상사 분이 커피 사주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할 때나, 누군가 고마움의 표시로 자리 위에 커피를 올려주었을 때, 동기들과 잠깐 시간 내어 카페에 갔을 때 등등. 어떤 날은 4잔을 마시기도 했다. 아침에 피곤해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점심을 같이 먹은 선배가 커피를 한잔 사주고, 상사와 커피 한잔하면서 업무 이야기하고, 퇴근하고 카페에서 친구 만나면 또 한잔했다.


나는 커피의 향과 맛은 좋아하지만, 감정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조금 더 각성하고 긴장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커피를 가능하면 마시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정말 피곤하면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잠깐 누울 수도 있고 산책할 수도 있어서 커피 대신의 선택지가 많다.


하지만 이따금 정말 굳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는 드립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신다. 집 주변의 카페에서 갈아주는 원두는 200g에 15,000원이다. 나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써서 8번 정도 분량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내리는 커피는 이상하게 회사에서 마시는 커피만큼의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약간 급한 마음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햇빛 드는 창가에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임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씩 집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정말 멋진 꽃 모양 드리퍼('NCW'의 FLOWER dripper. 38,000원)로 향 좋은 커피를 내려줄 때도 행복감을 느낀다. 커피는 나한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급한 마음을 주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손님을 맞아주면 적절하다.



이것으로 *<수입과 지출> 연재를 마칩니다. 5명의 2024년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행 본은 현재 샵메이커즈(부산) 매장과 온라인 샵을 통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mochorok.stud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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