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악몽을 꾼 거야.
화창한 날이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경관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와 단 둘이 데이트를 나갔다. 그는 나를 데리고 붉은색 나무로 지어진 카페로 데려갔다. 우리는 넓게 펼친 초원과 강가에 앉아 맛있는 음료와 간식을 먹었다. 어쩐지 완벽한 날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흰색 오프숄더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믿기지가 않는다. 당혹스럽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매뉴얼도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함께 강가에 앉아 있는데.
단 한 번이라도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있지...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얘기?"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교환학생일 때 나를 만나고 잠시 떨어져 지내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우리 집 근처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박혀 온라인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때 그는 몹시 외로워했다. 코로나였다. 학원에 다니거나 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친절하지도 않다고 그는 늘 말했다. 나는 늘 외롭고 힘들어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때 당시에 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때 마침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그때 당시 일을 쉬고 있는 내 동생을 소개해주었다.
"너 쉬니까. D도 만나고 같이 한국어 공부도 하고 그래."
나는 내 남자 친구를 믿었다. 아예 옵션으로 둔 적도 없던 상상이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다른 이성에게 끌림을 느낀다고. 그게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좀 넘었을 때였다. 그는 다른 이성에게 끌림을 느낀다고 했고, 나는 그게 당연히 무작위적인 다른 누군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른 누구를 만나지 않는 때였고, 아마도 길을 가다 마주치는, 카페에 가서 마주치는 어떤 무작위적인 여자를 말하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때 그는 늘 외롭다, 힘들다, 슬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는 늘 괜찮다, 이걸 해보면 어때?, 넌 해낼 수 있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도 타국에서 홀로 떨어진 경험이 있었다. 그 외로움을 이해했다. 하지만 끝없는 그의 말. 외롭다는 말에 나는 결국 의문했다. 대체 내가 옆에 있는데 너는 왜 늘 외로운 걸까.
끌림을 느낀다는 그의 고백에 나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해줬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마음이 동할 수도 있다고 괜찮은 감정이라고. 인간적인 마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를 진정시켜줬다. 멍청하게도 그가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아서 그가 열심히 마음에 자꾸만 침범하는 어떤 유혹, 내지는 끌림과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솔직하게 말해준 그가 투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1년 반쯤이 더 지나고. 어느 날. 화창한 날. 나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믿기지 않는 말을 들고 머릿속에서 서서히 정신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있지...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얘기?"
"그때 내가 다른 이성에게 끌림을 느껴서 힘들다고 했던 말 있잖아."
"응. 기억나. 근데 왜?"
"그거 사실 너 동생이야."
...
난 사실 지금 잠시 미쳐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염없이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와는 헤어졌다.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 여러 고민을 겪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고 훌훌 털어버리고자 한다.
나는 잠시 정신이 나간 이 순간 생각한다.
그래. 나는 잠시 악몽을 꾼 거야. 그리고 아직도 정신이 몽롱해서 꿈 속이라고 착각을 하는 걸 거야.
그래. 이건 악몽이야.
나는 악몽을 꾼 거야.
그런데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거지?
아니. 이미 깨어난 걸까?
여긴 어딜까.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깨어나려고 한 없이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고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중이다.
정신이 혼미한 나날이다. 빨리 이 꿈에서 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