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나는 목표를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살겠다는 목표. 보통 한 해가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 목표는 변하고 마음도 변하기 마련. 브런치에 써 놓으면 계속해서 불어나는 다른 목표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자는 나의 목표 하나만큼은 지키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수 있어?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건 내 감정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들이 아닌. 내 의식을 통해서 나온 무수한 말들임을 밝힌다.
의식을 통해 나오는 말들임에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위해서는 나를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도 많았다.
우선은 어떤 걱정들.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미움받으면 어쩌지? 좋은 글이라는 틀에 맞춰 쓰려면 이 부분은 지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이 글을 혹시 내 친구나 가족이 보고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
이와 같은 상념들이 나를 가로막았으며 나는 그 앞에 서서 고민하느라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을 다시 조금씩 삼가고 있었다. 그 짓을 하지 말자고 새해에 다짐했으면서도.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강력하게 가로막는 상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디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다.
"대체. 어디까지. 솔직하게. 할 말을 해야 될까?"
나는 스스로 대답해보았다.
"그냥 네가 솔직할 수 있는 만큼만 솔직하면 되지."
하지만 이내 나는 중얼거리며 나 자신에게 대답했다.
"내가 솔직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면 할 말이 없어. 그럼 숨겨야 하고 고쳐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게 너무 많아."
"그럼 쓰지 마." 하고 내 속에 무언가가 말했다. 두려움이었다.
"그게 말이야 방귀야. 그럼 솔직해지지 말고, 마주 보지 말고, 두렵거나 편협하거나 힘든 생각이 들어도 외면하면서 살라는 거야? 가슴에 커다란 물음표가 있는데 그 답을 찾으려고 솔직하게 마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라는 거야?"
"음. 그건 아니지.
그럼 넌 어디까지 얼마큼 솔직하고 싶은 건데?"
"나에 대해서라면 모두 다. 전부 다."
"그런데 그럴 수 있어? 왜 그래야 하는데?"
"왜?"
"그래.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꼭 그래야 한다는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잖아."
"그러게...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근데 만약 네 말대로라면 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멈추게 될 거야. 나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솔직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해버린 그 생각들이 날 가로막아서 더 이상 진실된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하려 하겠지. 그러면 할 말도 더는 없고, 들여다볼 나 자신도 더는 없어. 그래서 쓰지 말라는 말은 어딘가 찝찝해. 나는 글을 쓰고 싶어. 다만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을 뿐이야."
"네가 너에 대해 그 모든 구석구석까지도 솔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난 묻고 싶어. 넌 대체 그 글을 통해서 뭘 얻고 싶은 건데? 공감? 아니면 뭘 알려주고 싶은 거야? 경험을 나누고 싶은 거야?"
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받아들여지고 싶어? 공감을 얻고 싶어? 뭘 증명하고 싶어? 나누고 싶어? 기록하고 싶어?
어느 순간부터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으니 매번 누가 내 글을 보고 댓글을 달고 기타 등등을 신경 쓸 수밖에. 그럼 그런 것들을 전부 신경 쓰지 말고 글을 써 나가야 할까. 그렇게 치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외적인 질문을 하다가 나는 결국 중용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돈을 벌거나, 누군가 내 글에 호응을 해주거나 하는 상투적인 이유 말고, 진짜 왜, 왜 솔직하게 쓰고 말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지 나는 알아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이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고 싶은 이유가 무언지 알아내기 위해 찬찬히 그리고 또렷이 내 속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히 모습을 드러냈다. 글을 통해서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이 많고 누군가의 강요에 굴복하느라 나 자신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글을 쓸수록 나는 나를 느꼈고, 의식했고, 세상을 보았고, 의식하며 선택해나갔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명료함은 오직 무의식을 사고화한 의식에서 나왔다. 누군가가 폭행을 할 때도 그게 뭔지 몰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인간에서 이제는 그게 뭔지를 명확히 알아 대처하는 인간이 되었듯이 나는 무의식적 인간에서 의식하는 인간이 되었다. 오롯이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나가며 성장함으로써.
방황하는 시간을 거쳐 무의식에 존재한 수많은 질문들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냈다.
글을 통해 얻어낸 명료한 의식은 내가 솔직해지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내 속을 탐구하고 생각해나감으로써, 왜 그렇냐는 수많은 질문들에 흔들리지 않는 명료함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의식하는 인간, 의식이 선행되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그게 바로 글이 쓰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다.
의식이 선행되는 인간
우리는 의식으로써 선택할 수 있을까? 의식으로써 의식할 수 있을까?
그냥 내 속에 드문 드문 드는 어떤 감정들 말고, 내가 사고하고 의식함으로써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강렬히 믿는다. 어떤 상황이 와서 누군가 나에게 아니라고 말하며 다른 선택을 강요해도 내가 얻은 나의 답으로 명료해진 부분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나의 선택 믿고 밀어나갈 수 있다. 다른 그 모든 이들이 나에게 틀렸다 할지라도.
하지만 명료한 자신의 답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사고가 요구된다. 사고하고 사고하고 또 사고해보아야 명료한 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일들 앞에서 무의식은 너무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무단횡단으로만 예를 든다면. 사람들은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왜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납득할만한 대답이 나오진 않는다.
"당연히 그렇다"는 답은 쉽다. "왜?"하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그런 질문을 하는 나를 되려 이해하지 못했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 당연히 무단 횡단하지 말아야지. 그건 질서야. 질서."
그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누구에 의해서 나온 말인가?
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순간 누군가의 행동을 그르다고 판단하면서 실제로는 왜 그러면 안 되는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안된다는 말과 어떤 판단과 태도에는 내가 모르는, 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어떤 생각과 논지가 숨겨져 있다. 그저 질문하고 들여다보기 전까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정말 나 자신의 명료한 답으로 인해 나온 말인가. 내가 아니라는 답을 얻어서 나로 인해서, 나의 의식으로 인해서 나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아닐 때가 더 많다. 어쩌면 내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누가 나에게 말해서 일지도 모르고, 행동으로 보여줘서일지도 모르며, 사회의 풍조에서 온 생각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해오던 것 들 중 나 자신의 사고와 의식을 통해서 결정된 것이 얼마나 되는가?"
담배 피우는 여자
대학에 가서 가장 놀랐던 건 언니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었다. 엠티를 가서 언니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고, 밖에서 함께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 나의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접하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우리 친가는 남아 선호 사상이 워낙 강해 내 어릴 적에는 남자들이 한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요리하느라 바빠 다른 여자인 우리 사촌들은 큰 상 옆에 작은 상을 펴놓고 그 위에 놓인 밥을 먹었다. 며느리인 엄마나 큰엄마 작은 엄마들은 다 먹고 남겨진 밥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어른들 모두가 그런 상황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나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동생이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애는 "언니!" 하고 외쳤다.
"응?" 하고 내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 애가 외쳤다.
"이건 정말 잘못되었어!" 그 애는 나에게 이게 왜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가 당연하다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란 그 생각은 자꾸만 나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다른 모두가 그렇다고 한다 해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하는 거야."
그 속삭임 앞에서 나는 언니들의 당당함이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당신들은 나와 같은 여자인데 그리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느냐고 의문했다. 그 의문은 평상시에 본 사람들의 태도와 편견에 얼룩진 의문이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어떤 편협한 생각을 나도 모르게 내제화 했던 거다. 행동을 제약하는 어떤 강요에 굴복해온 세월이 길어서, 뜨문뜨문 내 속에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런 소리들이 들렸다.
"아니. 무슨. 여자가 낯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렇게 대놓고 담배를 피워? 망신이다. 정말. 망신이야."
그 생각들은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드문드문 내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역한 담배를 왜 피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한 때, 나는 한창 담배를 피웠고, 그로써 나의 무의식 속에 든 '여자가 대놓고 담배를 피우면 망신'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인 행동으로 이겨내며 쫓아냈다. 무의식으로 여자는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편협한 사상은 어느새 단단해진 의식 밖으로 분리수거되었다. 그로써 나는 사회, 사람,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들이 더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했다.
그 무형의 것들을 의식적 행동으로 이겨내 왔으므로.
글도 그랬다. 글도 나에겐 담배를 피우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해? 하고 내가 물으면 나는 대답해야 했다.
"의식이 선행되는 인간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넌 쓰고 쓰고 쓰면서 의식적인 삶을 택하게 될 때까지. 너는 계속 솔직해져야 해. 너의 한계를 깨는 일이 바로 너의 어떤 무의식들이 내는 편협한 소리를 죽이거나 쫓아내는 하나의 투쟁임으로. 너는 계속 싸워야 해. 싸우는 일은 쓰는 일이야. 그러니까 너는 한계를 가르지 말고 솔직하게 너 자신을 바라봐. 누가 너를 이상하다고 평가하거나 너를 미워할까 걱정하지 마. 너는 그냥 계속 담배를 피우는 거야. 여성으로서의 성이 자유를 얻듯이 너 자신으로써의 존재가 그 자체로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말이야."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해오던 것 들 중 나 자신의 사고와 의식을 통해서 결정된 것이 얼마나 되는가?
그 "왜"라는 질문 하나가 모든 걸 바꾸고, 모든 걸 뒤엎었다.
그 질문에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존재하는 것들에게 부여된 의미는 대체 누가 부여한 의미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는 말을 두고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았다. 의심을 품고 '왜 그런지' 추궁하니. 내가, 우리가 너무도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음을 깨달았다.
"왜 무단횡단을 하면 안 돼?"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해?" 간단한 두 가지 질문.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그 어떤 질문들의 답을 찾기까지도 나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그렇다"는 답은 쉽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 당연히 무단 횡단하지 말아야지. 위험하기도 하고 정해놓은 질서를 지켜야지. 그리고 당연히 어른을 공경하고 깍듯하게 대해야지.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왜? 왜 질서를 지켜야 하는데?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데? 왜?"
묻다가 묻다 보면 그런 답변이 나오곤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지키지 않고, 공경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하지만 나에게는 더 그럴싸한 대답이 필요했다. 저건 틀린 길이니까 그냥 저쪽으로는 애초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더는 나에게 먹히지 않았다.
굳이 무단횡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면 내가 얻은 답은...
"무단횡단을 하면 위험하니까?"
나는 중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중국의 찻길은 정말 정글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부족해다. 역주행에서부터 고속도로 무단횡단까지 살벌하다. 그런 사람들의 분위기를 타면서 나도 역주행이란 역주행은 다 해보았고, 웬만한 무단횡단이란 다 해보았다. 그렇게 사고도 몇 번 겪었고, 여러 경험을 해보았지만, 딱히 그런 경험들이 왜 무단횡단을 하지 말아햐 하느냐는 말에는 답을 주지는 못했다.
"우리가 무단횡단을 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니까. 질서를 지켜야 하니까?"
우리는 태초에 자연 상태였다. 자연 상태란 어떤 정해진 통용된 법도 약속도 없는 모두가 모두를 공격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까 내가 집이라고 지어놓고 살고 있는데 누가 와서 뺏어가고 날 죽일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뺏어가고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규칙적인 자연 상태에서 그런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니니 모두가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 무자비한 시대 앞에서 우리는 약속을 했다. 규칙을 정하고 규칙에 속하는 일원들을 지켜주기로. 그게 국가고 국민이다. 그래서 내가 이 국가에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기에 국가가 하라고 하는 어떤 규칙들을 지키는 거다. 그게 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지나가는 사람을 지키는 규칙이라면. 그로써 내가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에 나는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거다.
질문과 대답은 무단횡단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질문을 마주하고, 사고하고, 의식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한다. 그로써 우리는 의식이 선행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나는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무너졌던 나의 세상을 하나씩 재정립해 나갔다. 당연시 여겨온 생각들을 당연하지 않게 쳐다보는 일로써 사고하고 의식하며 답을 얻었고, 그 답은 그 어느 답보다 굳건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의식의 영역은 넓었고, 내 앞에는 헤쳐 나가야 할 수많은 상념들과 무의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찾아든 어떤 상념
사고를 하며 의식적으로 살기 위한 삶을 선택하는 기로 기로에서 나는 성장했다. 어느 정도 나의 답을 찾았다. 그로써 혼돈 속에 빠졌던 생각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고 생각하였으나, 다시 전 남자 친구가 했던 말에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 말. 나의 동생에게 성적 끌림을 느꼈다는 말 때문에.
때문에 나는 다시 "왜"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고, 여전히 암산으로 계산해서 답은 풀었는데, 다시 되돌아와 생각해보니 어떻게 풀었는지 까먹어버린 기분이 되어버렸다. 자꾸만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가슴속에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자꾸만 나를 꾸짖었다.
솔직히. 동생한테 끌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사람들은 그게 다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게 왜 어떻게 잘못된 건데?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왜 아닌데?
그 애는 그냥 솔직하게 말한 거잖아. 너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거잖아. 의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선 질문하고 솔직해져야 한다며.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한 그를 네가 탓할 자격 있어? 너도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잖아. 그러면 너도 상대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만 솔직하겠다는 거. 그거 이기적인 거 아니니?
그런 질문이 자꾸만 나를 찾았고, 분명 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는데, 다시 어떻게 풀었는지 찾아보려고 하니 다시 같은 질문. 처음 내 세상을 무너뜨린 그 질문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