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느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 꿈은 대학을 갈 때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온 세상에 오직 그녀와 그림 둘만이 존재했다. 그림을 좋아해서인지, 많이 그려서인지, 학교에서도 그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나 공부 그만두고 그림 그리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울었다. 그녀는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에게 있어 공부란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방패였다. 딸만큼은 그 방패를 가졌으면 했는데. 딸이 말했다. 나는 그 방패 안 쓰려고 한다고.
딸은 우는 엄마를 처음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녀의 확고한 생각은 조금씩 꺾여갔다. 그녀는 체념했고, 생각했다.
'그래. 공부하자. 공부한다고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아니니까.'
그 생각은 적나라하게 빗나갔다. 공부를 하니 그림을 그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대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면 짤막한 시를 썼다. 시를 쓰고 나면 그리고 싶은 욕구가 풀렸다. 선명한 색깔을 칠하는 대신 마음을 글자로 칠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참새에 대해서 썼다. 의자에 대해서 썼고, 나무에 대해서 썼다. 모두 방황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막 신입생이 된 그녀는 우연히 3학년 선배들이 하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듣게 되었다.
"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선배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대학까지 와놓고 저런 말을 왜 하는 건지. 그녀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냥 앞에 처한 것들을 잘 헤쳐나가는 게 잘하는 일'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3학년이 된 그녀는 캠퍼스 나무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게 자란 나무가 멀찍이 자라 있었다. 그녀는 그 큰 나무 아래서 조용히 생각했다.
'앞으로 난 뭘 해야 할까.'
자신이 공부머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단어를 외우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서실에 앉아도, 아침에 산 펜이 저녁에 다 닳아도, 시험이 끝나면 마법처럼 백지상태가 되었다. 외웠던 것들이 기억나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다 보면 되겠지 엉덩이를 붙인 지 3년이 되었지만 매 순간을 임시방편으로 급하게 메꿔나가는 기분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그저 그 사실을 속였을 뿐인데 모두가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이제야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빵꾸만 메꿔오고 있었다는 걸.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다. 오랜만에 종이를 펼쳐보았다. 몇십 분이 지나도록 점 하나도 찍지 못했다.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흐릿했다. 한참 동안 백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림 대신 커다란 물음표를 하나 그렸다. 아래에 작은 글자 몇 자를 적어 내렸다.
'지금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예전엔 답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문제조차 보이질 않았다. 모든 게 엇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흐릿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엔가 그녀는 시를 쓰려고 공책을 펼치다 문득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 예술 그 자체였다는 걸.
시를 쓸 때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 들었으니 글을 쓰면 자신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막장 소설을 써서 친구들이 돌려보며 즐겁게 읽어준 기억이 났다. 그녀는 글을 한번 써 보자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땐 형편이 안되었던 건데, 이번엔 그냥 형편이 없었다. 글을 들려주고 나면 사람들은 하품을 했다. 별로다. 재미없다. 지루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글이 뭘까 생각했다.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글을 고쳐갔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글은 형편이 없었다. 책방에 가서 책 몇 권을 사 왔다. 자신의 문제가 뭘까 생각하며 글을 읽었다. 몇 분 뒤 그녀는 얼굴에 들러붙은 책장을 떼며 꿈나라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어디에서 글 쓰는 법을 좀 배우면 좋지 않을까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소설 쓰는 법을 알려준다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글쓰기 세미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참가비 5만 원.
모임 장소에 가자 자리 위에 김밥 한 줄과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모임의 작가는 자신이 쓴 책이 많다고 자랑을 해댔다. 딱히 뭘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르쳐서 책을 내 돈을 번 작가들이 많다고 했고, 그 사람은 자신에게 감사해하며 금으로 된 열쇠라던지 각종 선물을 자랑해댔다.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대장'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고쳐들어도 그 말은 그러니 너희가 나에게서 배우면 날 '대장'이라 불러야 할거라는 말로 들렸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돈을 벌고 싶으면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식의 강연이 몇 시간씩 이어졌다. 1600만 원을 들고 오면 곧장 책을 내준다고 했다. 믿고 싶진 않지만 진짜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사람들은 고민하더니 뒤쪽으로 가서 계약을 했다. 소위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던 그 작가는 다음 달이면 2000만 원으로 올라가니 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고 재촉을 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이걸 내가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사회 초년생에게 1600만 원이란 큰 산과 같은 돈이었다. 대신 그녀는 세미나 쉬는 시간에 '대장'이란 작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대장'이 말했다.
"소설이나 동화 이런 걸로는 절대 돈 못 벌어요. 그런 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는 게 나아요. 나도 해봤는데 갈만한 길이 아니에요."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쓴 물만 들이켜고 참가비 5만 원을 주고 강연실을 나왔다. 그날 그녀는 세미나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 글쓰기 세미나 같은 데는 가지 말아야지.'
그날 저녁, 그녀는 술을 좀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오래전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공부해야 나중에 돌아가지 않는다. 나중이 되어서 너희가 공부를 하려고 하면 그때는 돌아서 돌아서 가야 한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게 꼭 공부만 그런 게 아니라고. 왜 어른들은 지금 가고자 하는 방향을 탐구하고 찾으면 나중에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고 공부만을 강조했을까. 나는 그때 글을 쓰지 않아서 지금 돌아서 돌아서 가고 있는걸.'
후회해도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야 자신이 갈 수 있는 모든 길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을 만족시키면서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좀 더 미리 생각해둘걸 후회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몇 군데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마무리는 늘 정해진 듯 자존감 감소와 퇴사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글을 읽었다. 사람들은 재미없다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 일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부터 넘어가지 않던 책들의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글 앞에서 그녀는 수많은 작가들의 영혼을 보았다. 등장인물을 만났고,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뜻과 의도를 굽히지 않는 일. 그것이 우리의 소신이며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자신의 진짜 문제를 알게 되었다.
진실을 쓰는 일. 누군가로부터 자신을 훼방받지 않는 일.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 앞에 서서 자신을 위해 맞서 싸우는 일. 그녀가 하지 못했던 일은 바로 그 일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일.
그제야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도 쉽게 스스로를 내어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그랬었고, 삶 앞에서도 그랬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라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평가 한마디에 자신을 뜯어고쳤다. 나 말고 그들의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말해야 할 때 함구하였고, 지켜야 할 때 내어주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글을 써서 누군가는 내 글을 좋아할 수도 또는, 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삶이 나의 것이 될 수 없듯이 자신이 아닌 글로 누군가를 만족 시킨들 그것은 나의 글이 아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의 길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글을 썼다. 자신의 말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씩 써내려 갈 때마다 그녀 삶에서 글은 골목골목을 비추는 조명이 되어주었다. 자신의 삶을 마주할수록 세상을 향한 오해의 꺼풀이 한 겹씩 벗겨져갔다. 함부로 상대를 판단하는 일도 멈췄다. 나를 마주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듯, 너를 알아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시간은 한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글은 그녀 삶에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만약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어땠을지 그녀는 생각해보았다. 삐딱한 시선과 자신을 향한 삐딱한 생각. 섣불렀던 생각 속에서 다만 글은 조명이었고, 자신의 삶을 조용히 밝혀주었다. 그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하늘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글을 쓰기로 해서 참 다행이었다고.
그녀는 백지 위에 쓴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크게 몇 자 적어보았다.
'당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마음이 참 좋다.'
오늘도 글은 어느 작가 지망생의 손에서 조명을 뻗쳐나가며 그녀의 삶을 조용하고 밝게 비춰주었다.
당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마음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