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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Feb 24. 2024

지루함 주의-읽으면 시간만 낭비하는 글

반드시의 출중한 사회성

“중요한 일이니까 이것 먼저 처리해 줘. 반드시”


부사 반드시의 의미는 상대에 대한 부탁 이전에 마치 그것이 이뤄져야 하는 일이라는 묘하지만 정당한 당위와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반드시라는 제안이 그걸 받는 대상에게 수렴되어야 본래 “반드시”의 의미도 퇴색되지 않는다. 반드시에 마음이 걸려 부탁에 응하는 대상은 제안자의 부탁에 응한 것인가, 제안을 수용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평판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손익을 계산한 행동인가.


먼저 상대의 제안에 못 이겨 미심쩍지만 수용한 결과라면 반드시는 반드시 이뤄져야만 하는 타당성에서 한발 빗겨 선 것이다. 그건 두 인격체의 상호수용성 및 동질성 또는 이해타산과 관련하여 미래에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질끈 눈을 감고 들어준 보험 같은 것이다.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지만 들어줌으로써 암묵적인 약속을 상징하는 반드시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반드시는 인격적인 교류 없는 사무적이고 다소 건조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직장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상황에 따른 우선순위가 형성되는데 그때 어떤 일을 먼저 할 것인가 고민할 때 누가 나에게 더 중요한 사람인가를 셈하는 것과 같다. 내 기준에서 처리한 일의 방식이 그 일을 부탁한 사람에겐 자신을 위한 특별 서비스 같은 행동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기분 좋게 했을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어떤 의도가 없었으니까. 이때의 수용은 제안자, 수용자, 반드시, 셋 모두를 나아지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둔 꼴이다. Nothing will be happen!


다음으로 반드시가 가진 정당성에 동의하여 수용한 것이라면 반드시는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자기 당위를 이룬 것이다. 그건 부탁한 사람도, 부탁에 응한 사람도 아닌 그 일이 가진 속성의 고귀함 또는 가치가 드러난 전형이라 하겠다. 이때는 강압적인 지시나, 굴욕적인 복종의 감정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집단과 사회를 지지하는 기반을 두텁게 만든다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반드시의 가치를 알고 제안에 응한 행동에는 사회적인 면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물론 가치에 수긍한 것이지만 반드시라고 반드시 일어나거나 모두에게 수용되는 일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이며 합법한 일이라도 표면적인 당위와 마음에서 기인한 채택은 늘 일방통행일 수 있다. 따라서 거부 또는 수용의 양자택일 가운데 수용자는 위태로운 감정에 직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수용되어 반드시가 현실 가운데 이뤄졌다면 그건 반드시가 이뤄낸 정합성의 승리라고 말해야겠다.


다음으로 반드시를 수용한 까닭이 자기 평판에 기댄 것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반드시는 하나의 가장화된 무기이다. 내가 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에게 미칠 파장이 염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용자는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반드시 받게 된다. 만약 문장에 반드시가 없었다면. 또는 제안자가 자신의 의견인 반드시가 다자택일 가운데 하나라는 뉘앙스를 넌지시 흘렸다면, 그래서 가정법의 문장으로 인식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없이 자기의 의사를 따라 반드시를 고려했을 것이다. 반드시가 제1순위였다면 그의 의지를 따라 가장 먼저 처리했을 테지만, 만약 그것이 2순위, 3순위로 밀렸다면 당연히 수용자는 순서에 맞게 반드시를 고려하여 일을 처리하면 끝이다. 문제는 반드시가 문장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말은 맨 처음 또는 맨 나중에 오거나 덧붙여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수용자는 정상적인 가정법의 세계(객관적인 기준을 들어 일의 중요성을 판단함)에서 멀리 떨어져 새로운 가정법의 규칙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일을 2순위나, 3순위로 밀어둘 때 내게 오는 불합리한 결과는 무엇일까. 그 일로 나는 제안자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까. “그렇게 안 봤는데 왜 일을 그렇게 하냐부터 내가 그 정도까지 알려줬는데 왜 내 말을 무시하냐” 와 같이 인격적인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자칫 망상으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가정에 또 다른 가정법을 거쳐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손익 계산을 마치고 반드시를 수용한 경우다. 제안자의 의견을 수용한 수용자는 부당이득이 가져다 줄 달콤한 상상에 빠져 일의 전후관계를 망각하고, 반드시가 가진 고유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서와 회사, 나아가 사회는 병들어 기반이 흔들린다. 하나로 싸잡아 일반화시키는 리스크가 따르지만 가장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행동은 다음과 같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이지만.. -> 그럼에도 반드시!


그리고 그럼에도 반드시에 자위의 말 뭉치를 덧붙이는 것으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다.


“세상이 다 그런거 아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반드시는 제안자에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정신적인 승리를 제공하는 차원의 수단이 된다. 반면에 반드시에 걸려 고민하는 수용자는 다각도에서 반드시의 위치와 그것이 함의하는 것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내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파장을 고려하여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다.


느낀점: 부사 반드시의 사회성은 정말이지 출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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