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족일기

by 모든

빛의 미동조차 허락하지 않던 깊은 새벽. 거실 소파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손을 살며시 얹는다. 어지러운 머릿속 생각과 힘없이 발화된 말들은 충돌하며 서로의 몸통을 파고들어 어느새 기도가 된다. 난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새해, 가족에게 기분 좋은 목표가 생겼다. 가족일기를 쓰는 것. 데일리는 무리고 기념할 만한 순간을 잊지 않고 채워가기로 했다. 새해가 시작되고 바닷가 카페에 앉아 지난해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기록했다. 아내는 자기만의 일을 시작했다. 축하해. 5학년 아들은 전교부회장이 되었다. 정말 축하해. 뚜렷한 성취를 이룬 가족에 비해 난 제자리에 머물렀다. 괜찮아 힘내.


며칠 전 두 번째 가족일기를 작성했다.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처음 관측했던 날을 기념하며. 숲 속, 향긋한 시골 내음에 둘린 그곳에서 가족은 저마다의 일과 감사를 잊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게도 쓸만한 뭔가가 있었다. 15년도 더 지난 옛날, 몰스킨(Moleskine)에 적어둔 버킷리스트와 관련된 일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리스트 대부분 이뤄졌다. 난 이뤄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뤄졌다고 말한다. 능동과 수동의 중간에 머물러 어정쩡한 인생을 살아온 탓일지도 모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것. 요코를 변화시킨 시레토코의 유빙 앞에 서는 것. 세상의 중심이 된 피렌체에서 정신의 흔적을 좇는 것. 잠든 카잔차키스를 만나러 크레타에 가는 것.


지난 연말, 그러니까 12월 30일부터 마지막 날까지 밤새 번역철학에 관한 글을 작성했다. 시간에 쫓겨 퇴고도 못하고 서둘러 보낸 글인데 감사하게도 2월에 출간될 책의 일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카페에서 문학, 철학, 동화 읽기, 글쓰기, 성경 읽기를 진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지난 1년 동안 로스터리 카페장소를 둘러봤다. 정말 지겨울 만큼 보고 또 봤다. 그리고 오늘 오후. 아내와 방문한 곳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상당한 조건 (타협할 수 없었던)을 충족시켰다. 리스크와 가능성, 양날의 검이 있지만 일정 부분 감수를 전제로 선택해야 하는 게 지금 내가 가진 조건이다. 카페와 베이커리의 줄폐업 시대, 생두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대이지만 우리 부부는 내일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최종결정을 위해.


빨리 세 번째 가족일기를 작성하고 싶다. 기다리던 카페를 시작한다고. 새해에 시작한 가족일기는 기적일기가 되었다고. 그 기적일기는 시적일기가 되어 가족에게 중요한 좌표로 남을 거라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