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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May 08. 2019

반려 제품, 노트북

노트북


  4년 동안 묵묵히 내 곁에서 묵묵하게 일을 처리해 주던 노트북이 수명을 다 해간다. 가볍기로 유명한 제품인데, 함께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블루 스크린을 보여주지 않을 만큼 내게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조용해, 귀가 예민한 내겐 늘 만족스러웠다.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라, 커버하는 업무의 범위가 넓다. 수입 신고부터 촬영, 이미지 작업을 위한 프로그램에 관공서 액티브 X까지 하드 한 사용 환경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노트북은 여지없이 2년 안쪽으로 수명을 다 했다.


  그런데, 4년이라니. 무생물이지만 참 고마웠다. 늘 같은 업무 품질로 나를 맞아 주니 덕분에 내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늘 곁에서 날 도울 것 같던 노트북이 얼마 전부터 다리미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AS 센터를 방문했다. 수명이 남아 있다고 하면 고쳐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하필이면 메인보드가 수명을 다했다. 복잡한 회로가 심어져 있는 그 위에 CPU도 심고, 그래픽카드도 심으니 우리 몸으로 치면 신경 다발이 엮인 척추 같은 셈이다. AS기사님께서는 그냥 쓰다가 고장이 나면 새로 사라는 처방을 주신다. 노트북은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별은 늘 부담스럽다.


반려 노트북


  내게 노트북은 발레리나의 토슈즈나, 바이올리니스트의 줄이다. 소모품이면서도, 슬프거나 기쁘거나 노여운 순간에도 늘 함께 하고 있으니 '반려' 제품이라 할 수 있겠다. 사업자로 지낸 지난 15년 동안  다양한 브랜드, 여러 가지 형태의 노트북과 함께 했다.


  특히 사업 초기에 함께 했던 노트북, 포피가 생각난다. 포피는 후지쯔의 휴대성이 강조된 노트북 이름이었다. A5 종이만 한 포피는 나와 출장을 많이도 다녔다. 한 달에서 한 달 반마다 한 번씩 비행기를 타던 시절이었다. 함께 이우 도매 시장을 걸어 다녔고, 홍콩 기프트 페어도, 파리 메종 오브제에도 늘 함께 했다. 나와 안 다닌 데가 없는 내 친구, 포피.


  포피가 전원이 켜지지 않던 그 날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동그란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눌러도 결국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마음에도 줄이 탁 끊어진 것처럼 맥이 풀리던 그 순간. 나는 아직도 포피를 데리고 있다. 함께 했던 희로애락이 애틋해, 이사를 16번을 하면서도 지니고 다녔다. 아직도 서랍 안에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트북을 쓰게 될까 궁금해진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발맞춰 해마다 노트북을 바꿔야 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노트북과 스마트폰 없이 먹고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새 노트북을 정했다. 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일 년마다 노트북이 고장 난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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