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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an 15. 2020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캡슐 머신과 에스프레소 머신

| 알록달록한 알맹이


  그 알맹이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봄이었다. 시장 조사 차 파리에 갔는데, 상제리제 거리 한복판에 있는 한 상점에서 정체모를 귀엽고 알록달록한 알맹이들이 벽면을 한 가득 덮고 있는 걸 보았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화려한 컬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절로 발길이 그쪽을 향했다. 커피였다. 캡슐 안에 커피를 넣어 밀폐하고, 그 캡슐을 다시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크레마가 진한 커피 한 잔이 나왔다. 바리스타 없이도 고품질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저 캡슐과 머신이 있으면, 정말 편하겠어."

"고객 입장에서도 언제나 동일한 품질이 제공되니까 괜찮지 않을까?"

"저 브랜드를 들여오면 정말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작년 봄 즈음, 남편이 캡슐 머신을 사 왔다. 

"한 번 써 보자."

"그러자." 


  캡슐은 포레스트를 닮은 진한 녹색, 바다색, 라테 색으로 볼 때마다 심미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가끔 출시되는 기호 기상품은 디자인이 너무 귀여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했다. 구름 모양인 것 같기도 하고, 레이스 같기도 한 캡슐은 어떤 향인지, 어떤 원두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저거 주세요."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손쉬운 조작으로 진한 향과 짙은 크레마를 선사해 주었다. 색상별로 다른 향이 준비되어 있어 골라먹는 재미도 있었다. 게다가 사용한 캡슐은 본사에서 수거해, 알루미늄은 알루미늄대로 재활용하고, 커피 찌꺼기는 커피 찌꺼기대로 재활용한다고 하니, 환경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나의 소비 철학에도 잘 맞았다. 그런데 어딘가 늘 아쉬움이 있었다. 그게 뭘까. 


| 갈아 마시는 커피 


  일 년 즈음 같은 브랜드의 같은 커피를 마시니, 그 많은 종류 중에서 마시게 되는 종류는 두세 가지여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는 지루함이 있었다. 우유를 넣어 마시기도 하고, 인스턴트커피와 섞어 보기도 했지만 시원치 않다. 마침 사다 놓은 캡슐이 다 떨어졌다. 이 참에 원두를 갈아 압력으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바꿔 보자 싶다. 


  대체제로는 브레빌을 골랐다. 처음 커피를 내리던 순간은 살짝 설레었다. 쓰으르억억 거리며 그라인더가 원두를 갈아 내린다. 필터 홀더에 수북하게 쌓인 커피 가루를 손으로 살짝 쓸어 본다. 보송한 느낌과 진한 향이 돌아온 옛날 집 같다. 행복하다. 진한 향? 아! 이거였구나. 커피를 추출하기 전에도 커피의 향이 있는데, 그걸 잊고 지냈다. 


  캡슐머신은 밀봉한 캡슐을 통해 흩날리는 커피 가루와 튀어 오르는 커피 방울의 불편함을 해결했다. 늘 빈틈없이 완벽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캡슐머신이 뽑아낸 커피 앞에선 그날그날의 습도와 기온, 기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수동 머신의 들쭉날쭉함이 부끄러워진다. 


  원두커피가 들어있는 봉투 눌러 숨구멍으로 새 나오는 커피 향을 킁킁 맡아본다. 커피 홀더에 쌓인 커피를 템퍼로 누른다. 토출구에 핸들을 키워 넣으며, 금속과 금속이 만드는 짱짱한 촉감에 집중한다. 동그란 추출 버튼을 누르며 압력계의 빨간 바늘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걸 지켜본다. 나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편리함으로, 몸을 움직여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묶어 두고 있던 건 아닐까.  


http://bit.ly/작가정재경의초록빛창작생활

http://bit.ly/초록이_가득한_하루를_보냅니다

http://bit.ly/우리집이숲이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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