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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Apr 29. 2020

진정한 타임리스, 사랑과 아름다움

  내가 파리에 잠깐 있었던 것 알지? 겨우 한 달 반이지만, 그래도 종종 생각이 난다? 파리는 도로가 방사형이라, 어딜 가도 에펠 탑이 보여. 우리가 머물 던 곳은 파리 16구 트로 카데로였는데, 그곳에서도 에펠 탑이 잘 보였어.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나올 때마다 늘 그곳엔 에펠 탑이 서 있었어. 자주 보니, 철골탑이 친구같이 느껴졌어.

  매시 정각이 되면 에펠 탑은 조명쇼를 보여주거든. 에펠 탑이 스팽글로 만든 옷을 입고 무희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하게 움직이는데, 불빛이 실크 스커트처럼 촤르르륵 떨어져. 내 앞에 마주 선, 에펠은 꼭 나를 위해 반짝이며 춤을 춰 주는 것 같아. 그럼 발길을 멈추고 서서, 그 춤을 감상하는 관객이 되는 거야.


  에펠 탑이 추는 춤은, 주로 저녁 식사 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가던 길에 만났어. 입덧으로 울컥하는 속을 가라앉혀 가며 한 발 자국 씩 터벅터벅 걸어갈 때. 그땐 파리 전체가 세탁세제 향으로 가득한 배 같았거든. 계속 멀미를 하는 것처럼 울렁울렁했어.   


  토할 것 같이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메슥메슥함이 올라오면 내가 파리엔 다시는 안 온다고 중얼거리게 되는 거야, 그런데, 꼭 그때, 에펠이 춤을 춰. 그럼, 정말 내가 파리를 다시 안 올까? 싶은 거지. 저렇게 예쁜 불빛 춤을 또 보고 싶지 않을까? 그래도 그땐 도리질을 치며 정말 오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어.


  우리가 머물렀던 집은 돌로 지은 옛날 건물에, 몸 하나 겨우 들어가던 샤워부스에,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좁은 주방을 가진 한 칸짜리 메자닌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어. 뭔가 새로웠거든. 이미 전자식 도어록에 익숙하던 내 손은 빛바랜 흰색 플라스틱 네모 박스 위 동그란 초인종 버튼을 볼 때마다 일부러 눌러보는 고사리 손이 되는 거야. 열쇠 구멍에 동으로 만든 열쇠를 밀어 넣을 때도 뭔가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나는 것 같았어. 잊고 있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


  매일매일 와인 한 병을 마시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섭렵하며 파리를 만끽하려던 나의 계획은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한 달 반 동안 방에 누워 있다가, 슈퍼마켓만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우연과 돌발로 가득한 보물섬 같잖아.


  가끔 생각이 나더라. 그래도 꼭 다시 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어. '바우하우스와 현대미술'전에서 만난 샤를롯 페리앙의 부엌,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만나기 전까지는. 루이뷔통 재단에서 하고 있는 전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며 전은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어. 추억이 있는 파리는, 모처럼 두근두근하더라.


  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트로카데로를 찾았어. 입덧으로 울렁이던 속을 가라 앉혀가며 장을 보던, 그때 머물던 집부터  casino까지 가는 길. 지하철 역부터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어. 머릿속을 한참을 뒤적여도 선명하게 나타나는 길이 없었는데, 두 다리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더라. 33이라고 쓰인 주소 앞에서 발이 멈췄어. 바로 거기였어.

  슈퍼마켓을 만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를까. 설레며,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지. 저 약국에서 임신 진단 키트를 샀는데. 하며 코너를 도는데, 내 기억 속 카지노 간판이 보이지 않더라. 설마 없어졌나 싶어 발걸음이 빨라졌어. 다행히 있기는 있더라고.


   건물 1층 전체에 있던 슈퍼마켓은 반으로 줄고, 그 나머지 반쪽엔,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푸드코트가 들어와 있었어. 흔한 멀티쇼핑몰로 변해 있더라. 나는 기억 한 조각을 보고 싶었는데, 오히려 전의 추억에 새 이미지가 겹쳐지며 상이 두 번 맺힌 필름처럼 다 망가졌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 서운하더라.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도록 공간이 달라졌지만, 편리함이 가장 우선하는 가치일까? 돌아오며, 편리함과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             

                   

   조승연 작가의 '시크하다'에서 파리의 매력은 세계 젊은이들의 추억 금고라고 말하더라. 10살에 밥을 먹었던 식당에 20살이 되어 다시 가서 먹고, 50살에 가서 또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파리라며.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벨상 수상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파리를 영원한 젊은이의 도시'라고 불렀대.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소중한 것들이 뭘까? 사람, 사랑, 아름다움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 샤를롯 페리앙만 해도, 무려  90년 전의 디자인으로 나를 파리 한복판으로 이끌었잖아.


  2월 중순에 다녀오면서도 코로나 19가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어. 사람은 불과 하루 앞의 일을 모르잖아. 앞으로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에 무게를 더 실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는 일 같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아야겠다고도.


  그런데 말이야, 나 파리에서 뭐 사 왔는지 알아? 세제를 사 왔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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