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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16. 2024

낙엽이 물들 땐 정리를 한다

| 낙엽이 물들 땐 정리를 한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뭔가 찾을 게 있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과 제니의 신곡 ‘Mantra'를 보다 30분이 지났다. 절대로 30분이나 볼 생각이 없었다. 내 프로필엔 팔로우 3,453명, 팔로잉 953명이 있다. 인스타그램은 팔로잉한 953의 새 소식을 보여주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피드를 보여준다. 팔로잉한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


‘팔로잉 953’ 부분을 누르고, 카테고리에 뜬 순서대로 살폈다. 먼저 ‘교류가 가장 적은 계정’을 확인했다. 언제 추가했는지 모르는 팔로워부터 팔로잉 버튼을 누른다. 검은 ‘팔로잉’ 버튼이 보라색 버튼으로 바뀌며 ‘팔로우’가 된다. 가늘게 연결되어 있던 우리 관계는 해제되었다. 이 일을 여러 번 반복했고, 숫자는 여전히 900명대에 머물고 있었다.


팔로잉을 모두 해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불안 세대>에선 우리는 문화를 배우는 방식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을 습득하는 동조 편향과 그 집단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권위가 높아 보이는 권위 편향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성공적이고 높은 권위를 지닌 것을 알기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는 온라인이 유리하다. 0은 무리다. 팔로잉 953은 490이 되었다.


헐거워진 인스타엔 어제까지 안 보이던 친구들이 나타났다. 독일로 일하러 간 디자이너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고, 일본으로 간 작가의 스토리엔 디저트 맛집이 계속 보이고,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는 현장에서 글라스울 봉투 위에 앉아 일한다. 내친김에 블로그 이웃도 300명 넘는 인원을 100명으로 단출하게 정리했다. 커트 후 미용실을 나올 때처럼 가벼웠다.


| 시간은 흐르고 사람도 조금씩 변한다


오늘은 데이터 백업용 외장하드를 꺼냈다. 커맨드 키와 백스페이스를 함께 눌러 폴더째 숭덩숭덩 잘라 버렸다. 그사이에 절대 지울 수 없는 사진들이 있다. 식탁에 앉아 색칠 공부를 하며 사촌 형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다섯 살짜리 아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느라 엄마가 오는 줄도 모르는 아들의 뒷모습,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축구하고 있는 아들 사진이다.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친구들 속으로, 학교 속으로 점점 걸어 나가고 있다. 나와 하루를 거의 함께 보내던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길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른다. 가끔 한마디씩 하는 말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짐작할 뿐이다. 일일이 따라다니며 관리 감독할 수 없다.


아들은, 자식은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공부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책을 펴고 설명을 시작했다. 나의 방식은 맨 앞장부터 끝장까지 줄기차게 진도를 빼는 것이다. 아는 문제는 그냥 넘어가고 모르는 문제는 빨간 볼펜으로 X, 알듯 모를 듯 한 문제는 세모 표시를 하며 습득한다. 두 번째 볼 때는 그래도 모르는 것을 체크하며 나아간다. 세 번째도 그렇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쉬운 방식을 아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이 나에게 자기의 공부 방식을 설명해 주었을 때, 나도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자기는 자기의 방식으로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아들이 나와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개체라고 느꼈다. 나는 손으로 연습장에 쓰며 공부하는 것을 공부했다고 느끼지만, 아들은 아이패드를 보며 눈으로 공부하는 듯하다. 방식이 맞다면 결과가 이야기해 줄 것이다. 어차피 자기에게 맞는 길은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 현재에 집중하기


오늘 모의고사를 본 아들이 가족 카톡방에 숫자를 불러 준다. 그중 한 과목은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내려갔다고 아쉬워한다. 누구나 아는 아쉬움이다. 뭔가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시험 보느라 애썼다. 수고했다. 맛있는 거 먹자. 라고 보낸다. 쇠고기 장조림을 새로 하고, 애호박을 채 썰어 전을 부치고, 배추에 꽃새우를 넣은 토장국을 끓였다.


저녁을 먹으며 “그래도 엄마는 조금 아쉬움이 있어. ‘이만하면 됐다’하는 마음보다 ‘끝까지 해 보자’하는 마음이 나를 더 자라게 하는 거 같아. 끝까지 해 보지 않으면 나중에 꼭 후회가 남더라. 그때 끝까지 해 볼 걸 하고 말이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시선을 배춧국에 두고 “응.”하고 대답한다.


데이터를 정리하며 또 느꼈다. 어제처럼 느껴지는 일이 3년 전이고, 1~2년쯤 지났나 싶은 일이 10년 전이다. 그때 좋은 것도 많았는데, 그걸 참 몰랐구나 하고.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사진 속 아이 얼굴을 보며 그때 더 많이 눈을 맞추고, 더 많이 웃어주고, 더 많이 안아줄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걸, 아쉬움이 있다. 내일이 되면 오늘도 아쉬울 것이다.


관계도, 시간도, 사랑도 한강처럼 흐른다. 모의고사가 끝났다고 피시방에 간다는 아들에게 “재밌게 놀고 와.”한다. 네가 무엇을 해도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 그게 무엇이든 너를 존중한다는 마음, 그걸 알아주면 좋겠다. 부디 따스함에 동조하고, 친절함에 권위를 느끼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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