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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29. 2024

선명하게 시원한 가을밤

남종문인화가의 대가, 의재 허백련 선생의 작업실에서 

광주시립도서관에서 강연에 초대해 주셨다. 무등산과 가까운 곳이었다. 마침 근처에 미술관도 있었다. 경험 상 산속에 있는 미술관은 매우 아름다우므로, 무조건 가보기로 했다. 일부러 사전 정보도 찾아보지 않았다. 강연 시간보다 4시간 일찍 도착해 무등산에 올랐다. 


무등산 중턱에 나비처럼 내려앉은 모양의 의재 미술관은 건물도 작품이다. 건축가 조성룡,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종규 교수가 공동설계했고, 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대지 1824평, 건축 면적 246평으로 미술관 근처에 녹차밭과 제다 교육장, 의재 선생 묘소 등이 함께 한다. 


차가 포함된 입장권을 구입해 전시를 보기 시작했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마중한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설명과 그림을 함께 보다가 활짝 핀 모란이 그려진 여섯 폭짜리 병풍 앞에서 숨이 멈췄다. 분명히 만개한 ‘꽃’을 보고 있는데 붉은색, 검은색, 흰색 꽃송이들이 마치 호랑이들이 앞다리를 들고 포효하는 것 같이 으르렁 거린다. 기세가 대단했다. 이 작품의 제작연도가 1958년이라는 것을 알고 한 번 더 놀란다. 그때 선생은 68세였다. 

의재 허백련 선생은 남종문인화가의 대가로,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로 1등 없는 2등에 당선되며 주목받았다. 47세였던 1937년엔 광주에 정착해 후학을 양성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56세이던 1946년엔 일본인에게서 무등산다원을 인수해 삼애다원을 시작했고,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지도자를 양성했다.  


선생의 작업 공간은 간소하다. 다다미 세 장 위에 다기가 놓인 차탁, 서안, 종이와 벼루, 붓이 담긴 통이 있다. 벼루 아랜 평범한 수건이 깔려있고, 낡은 붓이 벼루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무 밑동이었을 붓통은 곧 뛰어오를 잉어처럼 힘이 넘친다.

선생은 그림을 그리기 전 늘 차를 마시고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렸다고 한다. 주전자는 금이 간 부분을 붙이고, 깨진 뚜껑은 다른 주전자의 뚜껑을 덮어쓰고, 대나무 손잡이가 끊어지자 철사로 연결해 썼다. 주전자에서 어릿어릿 의재 선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의재 선생은 차와 그림에 몰입한 분이다. 그렇게 집중해야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난다. 


다다미 세 장, 간소한 작업실의 여운이 길었다. 나도 집필실 배치와 레이아웃을 바꿨다. 개인에게도 최적화가 필요하다. ‘나’란 존재는 같은 사람이어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있던 책 1500여 권을 2층 방으로 올리고, 글쓰기 책상을 드레스룸 안쪽으로 옮겼다. 앉아 쓰다 서서 쓸 수 있게 낮은 책상, 높은 책상을 다 넣었다. 

‘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섬세해서 공간과 도구에도 영향을 받는다.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기준으로 현재의 상태를 읽는다. 컨디션에 따라서도 같은 분량을 처리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이 다르다. 종이 크기에 따라, 종이 질감에 따라, 쓰는 도구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심지어 잉크 색에 따라서도 생산성이 달라진다. 숲의 색상을 담은 만년필 잉크로 쓸 때와 깊은 바다색 잉크로 쓸 때 시간이 약 10% 정도 줄었다. 


그렇게 7년 정도 지났는데 요즘은 글씨가 흐물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년필은 꼭꼭 눌러쓸 필요가 없다. 빠르게 생각을 적을 수 있어 고마웠는데, 오래 쓰다 보니 손의 힘이 약해졌다. 노트에 연필로 모닝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글씨가 조금씩 더 야물어지기 시작했다. 


만년필보다 속도는 더뎌도 힘을 쥔 손으로 잡은 연필이 종이 위에 만드는 사각사각 소리가 좋다. 연필을 손으로 깎으려고 새 모양의 예쁜 칼도 하나 장만했고, 어떤 연필을 썼을 때 글이 더 잘 써지는지 탐색하는 새로운 재미가 생겼다. 팔로미노 블랙윙, 스테들러 루모그라피 블랙, 톰보우 모노, Viarco Desenho 등을 깎아 트레이 위에 나란히 올렸다.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김훈 선생이 떠오른다.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그 감각을 이해한다. 시간이 쌓여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점의 최적화가 필요하다. 의재 선생은 그림을 그리기 전 차를 끓여 뜨겁게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영원한 생명의 자기 예술은 선인 대가들의 전통과 기교를 배우고 난 뒤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의재 선생의 삶은 그림과 차와 후학에 몰두한 삶이었다. 내 삶은 무엇에 몰두하며 보낼 것인가. 가을밤이 선명하게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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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생활연구소

https://youtu.be/GlBAkBlKnrQ?si=Nsf5fnzHOOfWUf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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