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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28. 2017

다시 늦여름.

주택살이 일 년 차. 

태어나서 열다섯 살 때까지 주택에 살았다. 엄마 아빠와 동생들과 다 함께 살던 그 집은 대문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올록볼록한 유리가 끼워진 현관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높은 마루가 있었고, 나무색이 짙어진 몰딩과 방문이 있었다. 마루가 찌그럭거려 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했던, 본의 아니게 몸가짐이 방정해졌던 주택. 엄마가 고안한 플라스틱 빨랫줄 비밀 장치를 사용하면 녹슨 대문을 밖에서 열 수 있었고, 몰래 빠져나가 골목에서 실컷 놀다가 엄마 모르게 조용히 귀환할 수 있었다. 고 믿었던 그 시절. 


어둑하게 해가 진 언덕 위에 앉아 노을이 지는 걸 보기도 하고, 냇가에 몰려가 수영도 하고, 허준처럼 명의가 되리라 들풀 다 먹어보던 그 시절.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주방에서 엄마는 많은 음식들을 해 주셨지만, 지금 내 기억 속엔 시금치 된장국과 가자미 구이만 남아 있다. 그 집에서 동생은 아프기 시작했고, 우린 결국 이별했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몇몇 신에만 컬러가 살아 있고, 대부분은 무채색 페이드아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안팎으로 추억이 스며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계단 올라가며 불 켜고, 내려오며 불 꺼야 하는 센서등도 하나 없는 완전 아나로그. 

처음 이 주택을 만났을 때, 역설적이게도 온통 무채색인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도시 여성 같은 날이 선 외모와는 다르게, 우리가 모아 온 가구들을 올려놓자 가구들의 비례와 공간감이 살아나 살림살이들이 4D 아이맥스 영화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예쁘고도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강제로 지하부터 2층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운동도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리모컨도 거의 없어 반강제로 몸을 움직여 키고 꺼야 는 스위치들도 좋았다. 이사 오고 첫가을은 우리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들을 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늦여름 초가을 즈음 이사 온 이 집에서는 동트는 해를 바라보며 잠에서 깨는 아침이 좋았고, 층층마다 식물을 배치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생생한 생명체를 놓을 수 있어 좋았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이 공간에 배치한 200 여개의 식물들. 덕분에 SBS, KBS, MBC, 연합뉴스, TV조선 등등 방송에 많이 출연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추억. (나는 식물이 우리 건강에 도움을 주었음을 확신한다.) 이곳을 배경으로 나는 벌써 두 시즌의 우리 제품 카탈로그도 찍었다. 

카다록에 실린 사진 1. 
카다록에 실린 사진 2. 

겨울엔 추웠지만, 긴 팔 긴 바지를 입고 지내니 지낼만했고, 또 약간 춥게 지내는 편이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데 좋았다. 그래도 아파트에 비하면 사실 많이 춥다. 벽난로가 있으면 좋을 텐데, 차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자꾸 바라는 게 늘어만 간다. 우린 실내공기질에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연소되는 물질이 집안에 있는 것 자체가 신경일 쓰이지만, 아무래도 뜨끈뜨끈한 열원이 그립긴 했다. 아마 올 겨울에도, 내년 겨울에도 틀림없이 벽난로는 볼 때마다 망설이게 될 거 같다. 


봄과 여름엔, 옥상텃밭에서는 작은 수박도 길러 먹었고, 무화과도 따 먹고, 토마토도 따 먹고, 열무도 길러 두 번이나 김치를 담가 먹었다. 소소한 행복. 그렇지만, 산이 가까워 온갖 잡초 씨가 날아와 뿌리를 내려 각양각색의 풀들이 솟아났는데, 게임 퀘스트 클리어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뽑았다. 뽑아도 뽑아도 밀려들어오는 잡초들. 덕분에, 몇 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불편한 무릎 관절이 다시 삐걱거리기도 했다. 속이 시끄러울 때엔 무념무상으로 풀을 뽑다 보면 다 잊히고 진정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타이피.

https://www.instagram.com/p/BZQtKyWFe7a/?taken-by=jaekyung.jeong

아침에는 생각보다 뜨거운 햇빛 덕분에, 해가 진 후엔 모기 때문에 옥상과 마당의 풀을 정리하는데 애 먹었다. 봄에는 동네 사람들 모두와 새벽같이 모여 풀 제거하기도 했고, 폭우가 내리기 전엔 하수구마다 점검해야 한다. 동네의 미관을 해치지 않으려면 아무리 못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잔디를 깎아 주어야 하고, 낙엽도 쓸어야 하고, 너무 자라 지저분하면 잘라 주어야 하고. 몸뚱이를 뉘일 시간 없이 손이 많이 간다. 귀찮다면 귀찮은 일이지만, 부지런한 이웃분들을 보며 삶의 태도와 방식도 많이 배우게 된다. 


주택은 땅과 맞닿아 아무래도 벌레들이 많이 들어온다. 특히 다리가 많은 돈벌레는 수시로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하는데, 이젠 내가 더 재빠르다. 여유 있는 속도로 때려잡는다. 바퀴벌레나 개미 같은 해충은 없어도 화분이 많아 각종 벌레들이 출몰하는데, 웬만한 작은 벌레는 손으로 때려잡기도 하고, 식물 잎에 낀 벌레는 손으로 그냥 쓱쓱 닦아 내기도 한다. 처음엔 장갑을 끼고, 휴지로 닦기도 했지만. 적응을 잘 하는 나는 금방 익숙해졌다. 죽어도 못 하는 건 없다. 올 가을엔 거미가 많아 벌레들이 많이 줄었지만, 지저분한 거미줄들 청소가 남았다. 


무더운 여름. 미세먼지가 돔을 형성하면서 점점 더 덥고 습하다. 식물들이 너무 고생을 했고, 습기를 못 이긴 뱅갈 고무나무 한 그루와 팔손이 한 그루는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소소한 작은 화분도 시들시들해졌지만 그래도 잘 이겨냈다. 뿌리가 살아있는 나무들은 잎을 다 잘라 새 잎을 틔우게 도와주고, 뿌리가 썩어버린 애기들은 줄기만 잘라내 물병에 꽂아 주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리에서 생명을 뻗어간다. EM용액을 타 물을 주었던 뿌리에서는 다행히 벌레가 발견되지 않았다. 올해는 흙이 습하면 생기는 뿌리파리들의 공세가 없었다. 

주방의 아레카야자. 하도 잎이 무성해져 이발해 줬는데, 자기 컨디션 알아봐주고 손대주면 더 고마워하는 눈치다.
그림은 다시 원위치. 언제나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는 김은미 작가님 그림. 

푹푹 찌는 긴 여름 날을 견디고 멋지게 자란 수채화 고무나무. 아이를 넘어 다 자란, 잘 자란 청년을 보는 것 같다. 창밖에서 바라보아도 줄기가 뻗어나간 모양이 씩씩하고 참으로 아름답다. 일 년 동안 나무들은 쑥쑥 자랐다. 달걀 껍데기를 모았다가 굽고 갈아 화분의 비료로 주고, 쌀뜨물을 수시로 뿌려주며 키운 내 화분들. 나와 일상을 나누는 생명체들.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에서는 잎사귀들이 푸석푸석하더니,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반짝거린다. 신기하다. 말은 못 해도 녀석들, 너희들도 내가 좋구나. 

고무나무는 분갈이 해 주고서 키가 30센티나 더 자랐다. 적재적소에 손길과 마음이 닿았나보다.

나는 이제 원래의 업무량을 유지하면서도, 화분도 잘 키우고, 잔디도 깎을 줄 알고, 풀도 잘 뽑고, 벌레도 잘 잡는다. 잔디는 목마르다고 물을 달라 하고, 화분들도 얼굴 빼꼼히 들이밀며 나 좀 봐달라 조르고, 각종 벌레에 낙엽에, 일 년의 주택살이에서 등 붙이고 뒹굴거릴 틈 없이 우리 몸을 들들 볶았지만, 아들도, 남편도, 나도 이곳에서 아주 많이 자란 것 같다. 꼭 이 집이 아니더라도, 혹 첩첩산중 산골 속의 집이라도, 또는 이역만리 낯선 땅이라도 우리 가족은 또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널찍한 공간감을 즐기기 위해 가능한 넓게 비워두었던 거실을 그만두고, 파티션으로 공간을 분할했다. 파티션 위엔 추억을 담은 오브제들을 꺼내 다시 진열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소파 위에 더 자주 앉아 마주 보고 책을 본다. 가구는 자리만 다르게 배치해도 사용빈도가 달라지고, 쓸모가 달라진 공간은 새롭게 살아난다. 이사 온 기분으로 몇 달은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모처럼 깨끗한 공기로 맞이한 오늘 아침. 주택을 만나 살아온 일 년 후 기록을 남겨 둔다. 

헤이 선반으로 파티션을 만들어 준 거실. 아들은 뭔가 더 아늑해졌다 말하고, 손님들은 더 넓어보인다고 하신다. 
창고로 쓰이던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의 공간을 살려 비디오방으로 만들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보던 영화. 아들의 기억 속에도 공간마다 추억이 방울방울 맺힐까? 궁금하다. 

SBS 좋은 아침 하우스 다시 보기 :

식물과 자재로 미세먼지 잡는 집 : http://tvpot.daum.net/v/safd46adNAA6a9bNTnDl6nT
집 안 '좋은 공기' 유지하는 Tip : http://tvpot.daum.net/v/s31ddYNNNwfmf26KWbmWibw


6분 20초부터 제가 등장하는 MBC 경제매거진 M 다시 보기 :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5/4227261_17971.html


1분 23초부터 제가 등장하는 연합뉴스 다시 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22&aid=0000250748&sid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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