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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던마더 정재경 Jan 18. 2018

생각을 종이로 옮기는
가장 빠른 방법, 만년필

내 인생의 만년필들

내 인생의 첫 만년필은 20세기의 마지막 즈음, 1997년의 어느 날 수석 선배께서 선물해 주신 워터맨 만년필이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고, 군데군데 금색으로 반짝이고, 새빨간 케이스에 담겨, 온몸으로 여성용이라 말하는 만년필. 첫 눈에도 귀해 보였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기자가 되신 선배는 원고지 위에 만년필로 기사를 쓰셨다. 아마도 선배님께서는 풋내기 기자인 내게 만년필로 좋은 기사를 쓰라는, 무언의 응원을 담아 선물셨던 것 같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것처럼 사진도 흐릿하다. 과거의 내 만년필들.

그러나, 만년필 잉크가 가방 안에 흘러 번질까 신경 쓰였고, 취재 도중 잉크가 똑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스피드가 생명인 취재 현장에서 만년필이 웬 말인가 싶었다. 볼펜과 기자 수첩을 놓고 빠르게 적어 내려가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름답고 귀한 선물을 주신 마음이 감사했지만, 안타깝게도 20대 중반의 나는 만년필이 주는 심미감으로 불편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만년필은 새빨간 케이스에 다시 넣어 서랍 깊은 곳으로 옮겨졌다.   


2006년 즈음엔 프랭클린 다이어리가 대유행했다. 다이어리의 사용법에 대한 비싼 강좌들도 개설되었고, 작은 단위의 업무들을 빼곡하게 기록했다. 내 머릿속 회로도와 전혀 다른 다이어리를 쓰느라 애 먹었다. 자기만의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시행착오들이 있는 법이다. 그 다이어리에 투명한 라미 사파리 만년필로 적어 내려간 3년. 투명한 라미 사파리 만년필은 잉크가 얼마나 나갔는지를 바로바로 체크할 수 있어 좋았고, 잉크를 다 쓰고 충전할 때면 열심히 일한 듯한 착각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고부터는 중요한 계약서에 은은한 광이 나는 검은색 만년필로 서명하고픈 로망이 있었지만, 곧 전자 서명 시대가 왔고, 사업은 그렇게 멋있는 서명이 필요할 만큼 커지지 못해서 로망은 여전히 로망에 머물러 있다. 곧 들이닥친, 잉크를 채워 쓸 만큼의 여유도 없이 숨찼던 임신과 출산과 육아와 업무의 시간들 속에서는 되는대로 급한 대로 태스크를 한 개 한 개 쳐내는데 급급했다. 곧 스마트폰의 시대가 왔고, 만년필은 점점 더 내 일상의 바운더리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다시 만년필을 꺼내 든 것은 2017년. 줄리아 카메론의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매일 아침 모닝 페이지를 쓰라는 조언을 듣고서이다. 손으로 쓰라는 대가의 조언에 볼펜과 노트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뒤 한 장을 적기엔 볼펜보다 만년필이 월등하게 효율이 높았다. 일단 손이 덜 아팠고, 볼펜의 필기 속도는 느려 생각을 자주 멈추게 했지만, 만년필은 사고의 흐름을 잘 따라갔다. 이상하게도 볼펜으로 쓴 내 글씨는 읽을 때 눈을 부릅뜨게 되고, 만년필 글씨는 잘 읽힌다. 그래서 만년필은 아직 시장에서 건재하는 "클래식"이다.

 

이렇게 쓰고, 브런치에서 다시 다듬는다. 처음엔 1시간 걸렸고 지금은 30분 걸린다. 줄리아 카메론은 20분이면 충분하다고.

만년필로 글을 쓰다 보니, 내 라미 만년필은 촉이 EF라 가늘고 날렵해 글씨도 작고 날씬하다.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오랫동안 같이 했던 필기구지만, 세월의 흐름 동안 내가 변했다. 펜을 쥐었 땐 뚜껑을 뺀 채로 쓰는 길이가 좋은데, 뚜껑이 혼자 뒹구는 게 보기 싫다. 키가 작고, 가볍고, 심미적으로 만족스러우며, 뚜껑을 끼워 써도 무겁거나 불편하지 않은 길이. 부드럽게 흘러가듯 미끄러지지만 힘 있게 글씨를 담을 수 있는 만년필은 KAWECO에서 찾았다. 금장의 F촉이 단단한 느낌도 손에 착 달라붙는다.  


1883년부터 만년필로 먹고 산 브랜드. 마무리와 성능이 딱 독일스럽다. 라미보다 더 마음에 드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필기에 가볍고 심미적 만족도도 높다. 나무랄 데가 없다. 이 만년필을 만나기 전엔 몽블랑을 사야겠다 마음먹었으나, 취소했다. 다른 이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 내가 만족하는 그 지점이 다르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워터맨, 파카, 라미, 다이소, 스테들러, 파이로트 등등 많은 만년필을 거쳐왔지만, 지금의 나는 무겁고, 크고, 번쩍거리는 사물에서는 마음이 닫히고 차가워진다.

추억이 어린 만년필들. 20년 전부터 오늘까지. 오늘이 하루하루 닳아 추억이 된다.

내친김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만년필을 모두 꺼내 깨끗하게 세척했다. 커피물에 이틀 밤쯤 담가 두었더니 잉크를 머금고 다시 태어났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굳어 버린 만년필이라도 내 부름에 스멀스멀 다시 깨어난다. 나의 사고들을 글씨로 빠르게 변환시켜 오래 보관해 주는 만년필. 이젠 좋은 에너지를 주는 사물과 반가운 사람들과 되풀이 읽고 싶은 책에 둘러 싸여 살고 싶다. 정제된 일상은 삶의 질을 높인다. 깊은 숲을 닮은 색상의 새 습작용 만년필. 몸체를 돌려 뚜껑을 여는 순간, 내 머릿속 보물상자도 함께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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