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가끔씩 두 눈을 의심할 때가 있어요. 내 아내가 방금 죽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죽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포스팅을 볼 때요. 유튜브에선 말기 암 환자들이 항암 치료비, 암 통보를 받기까지 과정, 구충제 복용 생생 후기를 꼬박꼬박 올려요. 씩씩해 보이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요. 가족 중 누군가가 부고를 알려요. 남겨진 동영상에선 그렇게도 해맑은데요. 죽음도, 병도 늘 우리 곁에 있어요. 우리는 살기도 하지만, 죽기도 하는구나. 누구나 알지만, 인식하며 살지는 못했어요. 어제와 같은 오늘이 평생 계속될 것 같으니까요. 이제 인식해도 되겠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있잖아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는 얘기도 되죠. 대학교1년 선배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렇게 젊은 사람이 죽기도 해? 죽음은 주름 자글자글 노인들 얘기인 줄 알았거든요. 같은 달에 사촌 형이 계곡에서 익사를 했어요. 연극반 후배가, 과 동기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얘기는 나중에 전해 들어요. 내가 아무리 기가 막혀도, 세상은 꿈쩍도 안 해요. 그 누구의 죽음도, 일상의 세상에 깨끗이 녹아 사라져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중학생이었는데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거예요.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대요. 화장실에서 한참을 안 나와요.
-우는 거야?
-죄송해요. 게임하고 있었어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고요. 죽음에도 시장 가격이 있다면, 급락하고 있는 중인 거 맞죠? 연예인이 죽어도 그때뿐이죠. 죽었어? 아, 죽었구나. 이런 식이죠. 먹고살기 바쁘니까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각자의 죽음은, 가족이나 애달플 뿐이죠. 페이스북에 셀카 사진을 올렸던 말기 환자가 떠올라요. 눈동자가 안 보여요. 눈이 뒤집힐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그걸 찍어 올린 거예요.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올렸대요. 다음다음날 세상을 떠나더군요. 저는 공포와 위로. 두 감정을 동시에 느꼈어요. 가장 큰 공포는 외로움인가? 육신의 고통보다 잊히는 게 더 두려운 걸까? 죽게 생겼는데, 셀카를 왜 찍어 올리는 걸까?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얼굴도, 그 사진을 기어코 올리는 외로움도 무섭기만 하더라고요. 그래도 사진을 올릴 만큼의 힘은 있잖아. 말도 못 하게 아프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통까지는 아닐지도 몰라. 그런 희망을 갖게 돼요. 저는 위로가 돼요.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자주 주문해요. 멀리 있는 불효자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도죠. 다음 달에 사 드리지, 뭐. 미루고 싶어지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어요. 다음 달이 올까요?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뜰까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SNS의 순기능이죠. 이젠 죽음이 어디에나 있어요. 그동안은 숨어서 죽었어요. 이제는 드러내고 죽어요.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에 작은 파장을 일으켜요. 시간 허비하지 말고 살아라. 이보다 선명한 메시지가 있을까요? 코로나가 야속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기만 기다려서는 안 돼요. 우리의 마지막은 코로나와 전혀 상관없이 내일일 수도, 100년 후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안 쓰고 싶어질 날이 올까요? 모르죠. 인간은 가장 약한 동물 중 하나니까요. 나의 약함에 감사하며, 매일의 거대한 하루 앞에 작아지는 것. 그게 제가 저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