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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Dec 24. 2020

지금은 사라진 옛날의 겨울들 - 번데기, 10대 가요제

80년대 겨울은 참 춥고, 참 따뜻했어요 

1960년대 노들섬 출처 서울시 


1. MBC 10대 가요제 


80년대 MBC 10대 가요제는 크리스마스와 맞짱 뜰 수 있을 정도였어요. 저부터도 그깟 크리스마스였죠. 10대 가요제는 며칠 전부터 가슴 뛰는 축제였어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어서가 아니라, MBC 가수왕이 결정되는 날이어서 중요했죠. KBS에서 남녀 대상을 하루 전날 뽑긴 하는데, 예선전일 뿐이죠. 진짜는 MBC였어요. 조용필의 시대이기도 했죠. 조용필이 올해도 탈까? 못 탈까? 전국에서 보낸 어마어마한 엽서를 집계해서 가수왕을 뽑았어요. 1982년 대이변이 일어나요. 이용이 받은 거예요. '잊혀진 계절'의 이용이 '비련'과 '못 찾겠다 꾀꼬리'의 조용필을 이긴 거죠. 충격으로 다음날 밥이 입에 안 들어가더군요. 저야 밥 한 번 굶으면 그만이지만, 조용필님께서는 얼마나 낙담하고 계실까? 가슴이 찢어지는 거예요. 1983년부터 가수왕을 연달아 접수하면서, 저의 아픔도 서서히 치유됐어요. 전 국민이 손에 땀을 쥐며 기다리는 시상식은 이제 없죠.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쇼미 더 머니'와 '미스터 트롯' '팬텀 싱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아이돌을 응원하는 시대니까요. 


2. 썰매와 연날리기 


홈메이드 썰매를 쇠꼬챙이로 질질 끌며 놀았죠. 사과 궤짝이나 나무판자를 톱으로 썰어서, 굵은 철사를 바닥 쪽에 감았죠. 굵은 철사가 레일이 돼서 빙판 위를 미끄러지죠. 승차감이 형편없었어요. 쇠꼬챙이로 아무리 찍어대도 나가야 말이죠. 비료 봉지가 승차감이나 가성비면에서 훨씬 더 뛰어났죠. 그래도 수제 썰매는 뭔가 갖춘 느낌이었어요. 제대로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비교 우위의 인간이 된 느낌이었죠. 하늘을 나는 연도 어디서나 날렸어요. 가오리연은 뛰어다니면서, 방패연은 실패를 풀면서 날렸죠. 다른 사람의 연줄을 끊어야 이기는 연싸움은 참 근본 없는 놀이였어요. 남의 멀쩡한 연을 그렇게 날려 버리는 게, 뭐가 그리 재미났을까요? 미아리 아이들에겐 삼양동 빡빡산이 연 날리기 명소였어요. 민둥산이라서 성가시게 시야를 가리는 게 없었거든요. 신문지로 만든 꼬리가 일렁이는 못생긴 연들이 뿌연 하늘을 채웠어요. 추워 죽겠는데, 연 날리기가 좀 재밌어야죠.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 실패를 놓을 수가 없었어요. 내 연이 저렇게 높이 뜰 줄 누가 알았을까요? 


3. 소라와 번데기


가장 대중적인 건 떡볶이와 오뎅이었지만, 겨울이 되면 번데기와 소라를 파는 자전거 행상도 많았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소라와 번데기를 꼭 같이 팔았어요. 종이컵에 담아 주는데, 중요한 건 국물이었죠. 번데기를 적당히 졸여서 자작자작 국물이 흥건했어요. 그 국물이 진국이었죠. 지금은 굳이 벌레 국물을 흡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때는 너무나 소중한 맛이었죠. 소라를 이쑤시개로 콕콕 찍어서 입에 넣으면, 작은 동전 같은 게 입천장에 다닥다닥 붙곤 했죠. 그 소중한 번데기와 소라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사람들이 안 찾아서일까요? 번데기와 소라가 귀해져서일까요? 의정부 가는 길 금성 스케이트장에서 먹었던 번데기 국물 맛이 이토록 생생한데요. 


4. 리어카와 삼륜차 


겨울엔 연탄을 가득 담은 리어카가 종일 대로변을 오갔어요. 연탄가게 아저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매서, 과연 저 까만색이 지워질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죠. 아버지는 서울 우유를 배달하셨는데, 겨울이면 역시 리어카를 써야 했어요. 자전거가 눈길에 워낙 잘 미끄러져서요. 온 가족이 새벽이면 리어카를 끌고, 밀고 했어요. 열 살 아이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아버지를 도왔다니까요.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가니까, 양말을 비닐봉지로 한 번 감싸고 신발을 신었어요. 그래도 눈은 사정없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서, 발가락이 깨지는 줄 알았죠. 삼륜차도 기억나요. 바퀴가 세 개인 미니 트럭이었어요. 앞모습이 독수리처럼 생겨서, 로봇처럼 멋졌죠. 이삿짐도 달걀도, 채소도 리어카를 끌며 팔았어요.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지면 크게 다치기도 했죠. 오르막길 앞에서 한숨을 쉬면, 길가던 사람들이 재빨리 손 걷어 부치고 함께 밀었죠.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도 리어카에 짐보따리를 싣고, 살금살금 밤의 세상 속으로 사라졌어요. 전봇대 백열등이 죄지은 가난한 범죄자를 쫓았죠. 


5. MBC 예쁜 엽서전


MBC 라디오에서 주최하는 예쁜 엽서전은 아주 큰 행사였어요. 전시는 2월에 여의도 백화점에서 했지만, 12월부터 달아올랐죠. 자기가 보낸 사연이 과연 소개될까? 예쁜 엽서전이 아니어도, 그냥 소개되는 것 자체가 경쟁이 치열했어요.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이수만의 음악 캠프 오프닝에 사연이 소개된 사람입니다. 하하하. 글씨만 예쁘게 쓰면 눈에 띄겠어요? 포스터 칼라, 수채화 물감, 크레파스, 색종이 온갖 재료들이 동원되어야죠. 저도 열심히 그려서 응모야 해봤죠. 전시회에 직접 가서 봤더니, 피카소, 달리, 마티스가 거기에 있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참 웃겨요. 코딱지만 한 엽서 보러 가겠다고, 미아리에서 그  먼 여의도까지 가서요. 기다란 줄 맨 끝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벽에 붙은 엽서를 고개 쭉 빼고 봐요. 얼핏 놀라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인파에 깔려 죽을 것 같아요. 엽서 한 번 힐끗 보고, 다음 엽서 보다보면 끝이에요. 뭘 본 건가 싶죠. 촌놈이 여의도에 왔다. MBC 방송국이 코앞이다. 그게 열한 살 꼬마의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세상은 넓고, 그깟 엽서에 전부를 거는 미친 인간은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쓰고, 크리스마스에도 씁니다. 좀 오기 아닌가? 아니에요. 그냥 쓰는 삶과 안 쓰는 삶, 둘 중에 하나를 고른 것뿐이에요. 디지털 코드 0과 1에서 1을 고른 거죠.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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