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늙어가고 있을 친구들에게 보내는 안부
그런 에너지가 가능한 게 스무 살이어서일까? 대학생이어서일까? 민주 광장 앞에 빙 둘러서 율동이란 걸 배우는데, 아무도 유치하다고 시비를 걸지 않았지. 선배가 까라면 까야하는 건 줄 알았으니까. 입학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애교심은 활화산이 따로 없었어. 무스를 바르고, 파마를 한다고 사라질 촌티가 아니었지.
사발식이 그렇게 기다려진다던 기영아.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그런 놈이 몇 모금 마시고 오바이트를 하면 어쩌자는 거니? 송곳처럼 흔들리지 않고, 한 번에 들이켜던 권정희는 크게 될 줄 알았어. 그렇다고 기영이가 안 크게 된 건 아니지만. 사발식은 욕먹어 마땅하지. 막걸리 두 병을 원샷해야 신입생으로 받아준다니. 억지도, 그런 억지가 어디 있냐고. 적당히를 몰라. 질질 흐르는 것까지, 살뜰히 받아서 다시 먹이는 선배들은 차라리 악마였지. 독한 93학번은 몇 번을 오바이트하면서도, 꾸역꾸역 사발식을 완수했지. 92학번 선배들은 밥솥 용기로 원샷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꾹꾹 눌러서 담았겠어? 신발에다 마셨다. 양말을 짜서, 먹였다. 더러움이 훈장이고, 자랑이던 선배들. 그 거지 같은 사발식이 뭐길래, 까칠하고, 서먹하던 촌것들이 엉겨서 우리 93학번, 우리 국문과. 신생아 때부터 국문과에 오고 싶었던 것처럼, 그런 오버가 없더라. 선배들이 바라는 대로 잘들 놀아났지. 걱정해야 할 미래는 한참 후에나 올 거고, 당장은 1학년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푸르다 못해, 뚝뚝 흐르던 젊음이었으니까. 온갖 사투리가 섞여서 오가는 게, 나는 그렇게도 신기하더라.
선배들이 수첩 들고 밥을 사주겠다고 쫓아다니는 것도 신기했어. 우리가 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해졌지. 마음에 드는 후배는 시계탑에서 돈가스를 사준다더라. 별의별 루머가 떠돌았지. 수업을 들어가는 게 왠지 손해고, 청춘에 대한 배신처럼 여겨졌지. 시대를 잘 탄 덕이지. 요즘엔 가당키나 하겠어? 누군가가 오바이트한 걸 비둘기가 열심히 쪼아 먹을 때, 공복의 커피를 들이켜던 깡통(매점)의 아침이 생생해. 남들은 수업이다, 출근이다 바쁜데 술 처마시고 비틀대며 집으로 가야 하나? 학교로 가야 하나? 한심한데 그 감정도 잠시 뿐인 스무 살이었지. 하숙하던 친구네 놀러 가면 손님일 뿐인데도 고기에, 찌개를 제대로 얻어먹고 오곤 했어.
교양 영어 시간엔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어야 했는데, 미진이와 미정이가 발음이 그렇게 또 좋았어. 오오. 국문과에도 저런 인재가 있었다니. 제일 억울한 건 상석이었지. 상석이는 평소대로 읽었을 뿐인데, 교수님은 나오라고 하더니, 학번과 이름을 물으셨지. 그래서 학점이 C가 나왔던가? 내가 상석이 시험지를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는데, 나는 B가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어. 평소대로 살았을 뿐인데, 교수님은 반항하는 거라고 오해를 하시더라. 특유의 삐딱하고, 무료한 말투는 집안 내력이더라고. 상석이 집에서 내가 목격했거든. 상석이 동생은 한술 더 떠서, 나무늘보가 환생한 줄 알았어. 그러니까 상석아, 너도 학생이 좀 싹퉁머리 없다 싶을 때 봐주고 그래야 해. 개또라이 제자가 왜 안 나타나겠어? 천하의 악필이 교수님이 되면, 칠판 글씨는 어떻게 쓰나 궁금해.
이제 다들 오십 줄이 내일모레구나. 너희들은 동기 모임 잘 나가니? 나야 외국에 있으니까, 나갈 수가 없지. 한국에 있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모임은 좀 불편해. 너무 오래 안 보니까, 미리 어색해지더라. 갑자기 늙어져 버린 우리를, 서로가 감시하듯 관찰할 첫 십 분이 좀 무서워. 누가 알았겠니? 우리도 거리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용기가 필요한 게 나만은 아닐 거야. 용기든, 사회적 성공이든, 그리움이든 뭐라도 하나는 있어야 모임에 나갈 수 있다는 걸. 그게 어른들의 모임이란 걸 알아 버렸다. 93년도는 마법의 시간이었어. 오바이트를 하고도 다음날 술을 마실 수 있었고, 저녁밥을 두 번 먹어도, 아침이면 새롭게 배가 고팠지. 서태지와 015B와 김건모가 있었고, 맥심 모카 골드 마일드가 탄생한 해였지. 아모레 트윈 엑스를 바르면, 김원준이 되고, 이병헌이 되는 줄 알았던 93년도였어.
잘들 살고 있니? 말이 쉽지, 잘 사는 게 어떻게 쉽겠니?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이젠 노화의 공격이 우리를 괴롭혀. 그러니까, 얼마나 다행이니? 그때의 스무 살이 있었다는 게. 철없이 희망하고, 긍정하고, 방탕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게. 청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 우린 분명히 누렸어. 특혜의 시간이었지. 평생을 우려먹을 사건을 그때 다 만들었어. 더 늙어서, 지하철에서 아무나에게 말을 걸 때쯤이면 우린 훨씬 가벼워져서 다시 서로를 찾지 않을까? 나잇값 못한다고 욕 좀 먹으면 어때? 그때는 우리의 세상이라고, 우리 입으로 떠벌리자.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 언제는 인정받아서 청춘이었니? 그렇게 주책 떨면서, 놀아보자. 수업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서, 스릴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새롭게 젊어져서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놀아보자꾸나.
PS 매일 글을 씁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청춘이고, 내일도 청춘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그 씨를 저에게 듬뿍 뿌릴 참입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아로,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