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우 Feb 13. 2021

한국에서 살고 싶은 곳들

북적이거나, 밝은 동네가 좋아요 

왼쪽부터 통영, 인천 용현동, 하동 

12년 넘게 태국에 머물고 있어요. 어쩌다 보니요. 떠돌며 살 줄 몰랐어요. 방콕이란 도시에서, 이렇게 오래 붙박이처럼 살 줄은 더더욱 몰랐네요. 그래서요. 예측 같은 건 안 하려고요. 12년 전에, 내 의지는 방콕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가 아니었으니까요. 1년에 한 번은 꼭 갔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국 땅 밟는 것도 쉽지 않네요. 이제 한국은 저에겐 굉장한 여행지예요. 사발 공기를 엎은 것처럼 낮고 두툼한 산, 복지 국가를 이미 이루었나 싶은 한강의 달달한 풍경, 주황색, 연두색의 버스들, 재래시장의 시뻘건 떡볶이가 저의 시신경을 꽁꽁 묶어서는 풀어주지를 않아요. 아, 여기라면 살고 싶다. 그런 동네들이 있어요. 한국에서 산다면, 여기에서 살아야겠다. 


1. 가장 살고 싶은 곳은 합정역, 상수역 주변 


이곳 집값 비싸죠. 저에게 돈이 넘치게 많다면, 합정역 주변에서 살고 싶어요. 실제로 홍대 주변에서 살아 보기도 했고요. 좋은 이유는 너무 많죠. 한강 가깝죠. 대학교 주변이라 활력이 넘치죠. 개성 넘치는 카페들, 식당들, 소품점들이 어디에나 있죠. 대부분은 외지인인데, 사는 사람이 되어 낯선 사람들 사이를 걷는 기분도 좋더라고요. 방송 작가들이 많아서, 딱 보면 알죠. 무심하게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저대로 또 글을 써요. 카페가 다 작업실이죠. 집 주변에, 수백 개의 작업실을 거느리고 살고 싶어요. 통장에 백만 원뿐인 사람이지만, 합정역 주변 아파트 시세를 검색하는 게 취미인 사람입니다. 꿈꾸는 건 공짜니까요. 한강 보이는 18평대 정도면 족해요. 막상 그 정도 돈이 생기면, 24평을 욕심내겠습니다. 방은 필요 없어요. 거실과 일체형으로 개조한 구조면 더 좋겠어요. 


2. 이렇게 우아한 시골이라면, 눌러살 수 있겠다 - 구례 


한국의 산세야 모두 아름답지만, 구례를 보면서 여기다 싶더군요. 지리산이 가로로 첩첩이 둘러싸고 있더군요. 산인데, 막상 오르면 높은 산이 맞는데, 두툼한 카펫처럼 포근해 보이더라고요. 구례, 딱 이름만 들으면, 촌스러운데 우아한 풍경에 첫눈에 반했네요. 하동이랑도 꼭 붙어 있더군요. 전라도 사투리가, 조금만 가면 경상도 사투리로 바뀌는 것도 신기했어요. 하동, 구례 둘 다 좋아요. 봄의 섬진강을 매일 걸으면, 하루씩 젊어질 것 같아요. 예쁘고, 소박한데 웅장하고, 경이롭기도 해요. 자전거를 타고 해 질 녘의 섬진강을 달리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요즘엔 시골 어디도 세련된 카페들이 많으니까, 그런 카페 사장들이랑 어울리면서, 시간을 음미하고 싶어요. 


3. 복작복작이 딱 내 취향, 인천 구도심 


송도나 청라 같은 신도시 말고요. 인하대 주변이나, 빌라들 많은 동네요. 어릴 때 살았던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이 있어요. 제가 태어난 미아리와 어딘가 닮기도 했고요. 지역으로 사람 성격 나누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인천 사람에게 막연한 호감이 있어요. 허세끼 있는 낙천적인 사람? 개그맨이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이 배출됐을 것만 같은 동네예요. 한국 속의 작은 이탈리아 남부 지방 같아요. 이건 저나 우기는 엉뚱한 주장이라는 거 알아요. 구체적으로 이런 게 좋더라. 똑 부러지는 답은 못 대겠어요. 진짜 한국, 한국의 클래식, 한국의 흑백영화. 그런 느낌을 저는 인천의 주택 단지에서 받아요. 시장도, 집들도 삐뚤삐뚤,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친근함이 좋아요. 만나면 웃을 일만 있는 사람이 인천에 유난히 많이 살 것 같아요. 


4. 너무 예뻐서, 통영 


통영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아닌가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안에는 삶이 녹아 있어요. 관광객만 상대하는, 전형적인 도시들과는 좀 다르죠. 뼈대 있는 관광지라고나 할까요? 통영에 머물면서, 주위의 섬들을 하나씩, 하나씩 방문해 보고 싶어요. 봄의 통영에서, 도다리쑥국을 꼭 먹어 보고 싶어요. 그렇게나 별미라는데, 그걸 못 먹어 봤네요. 벚꽃 흐드러진 봉숫골을 천천히 걷고 싶어요. 통영의 봄은, 어릴 적 봄소풍을 닮았어요. 그 어떤 천진한 꿈도 허락될 것만 같은 따뜻함이 그곳에 있어요. 요즘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제가 그리워하는 호젓함은 많이 사라졌더군요. 그래도 통영의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있어서, 그곳에서 뉘엿뉘엿 꺼지는 저녁노을을 응시하고 싶어요. 경우 없이 다디단 통영 꿀빵에 아메리카노는, 무적의 조합이기도 하죠. 


5. 분당 이매역 주변 


제가 부모님께 큰 빚이 있어요. 파스타 식당을 하다 말아먹고, 은행 빛을 부모님이 대신 갚아 주셨어요. 분당 야탑역 동부아파트를 저 때문에 파셨죠. 그게 지금은 몇 억이 올랐는지 몰라요.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지금 본가가 경기도 광주인데, 분당 이매역으로 옮겨 드리고 싶어요. 분당에서도 콕 집어서 이매역이 좋아요. 과천 느낌이 좀 나요. 시끄럽지 않고, 탄천 가깝고, 지하철역 가까워요. 걸어서 갈 수 있는 맛집도 많고요. 이보다 살기 좋은 곳이 있을까 싶어요. 아파트는 낡았지만, 낡은 아파트도 예쁘게 꾸미면, 새집 될 수 있죠. 분당을 지나칠 때마다, 부모님께 너무 죄스러워요. 그래서 이매역에 어엿한 아파트 한 채 사드리고 싶어요. 30평 대로요.  


6. 나도 몰랐어요. 대구의 매력을 


대구를 강연 때문에 자주 갔어요. 대구가 그렇게 세련된 도시인 줄 몰랐어요. 공연도 엄청 많이 하더군요. 예전에는 솔직히 별 감흥 없었어요. 어디든 제대로 알아야 해요. 알아주는 소비 도시잖아요. 드립 커피 문화도 대구에서 시작됐다면서요? 루이 비통과 사투리가 모두 잘 어울리는, 이질적인 매력이 있어요. 대구 삼송빵집, 대구근대골목ㅠ단팥빵 드셔 보셨나요? 안에 팥이나 크림을 터질 듯이 넣어 주잖아요. 너무 노골적이기는 한데, 감히 반항할 수 없는 그런 맛이죠. 이젠 전국구 프랜차이즈가 됐지만요. 멋쟁이들 많고, 문화에 대한 욕구가 남다른 도시가 대구죠. 대구에 살면,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철저히 주변인으로 겉돌면서 살고 싶어요. 어디든 그렇지만 일로 엮이면, 그런 낭만이 왠지 사라질 것 같아요. 


7. 그때 봤던 벚꽃 때문에 - 군산 


군산을 오래간만에 갔더니, 도시가 아무런 생기도 없더군요. 한국 GM공장과, 현대 중공업이 떠나고 유령 도시 같더라고요. 그런데도 저는 월명산 벚꽃을 잊지 못해요. 벚꽃을 보러 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의욕으로 군산행 버스를 탄 것도 아니었어요. 지도에 아무 곳에나 점찍고, 가보기나 할까? 그런 충동으로 군산을 찾았죠. 특별하게 저를 잡아끄는 건 딱히 없었어요. 분명 그 해에 가장 찬란한 하루, 벚꽃이 만발한 하루를 저에게 선물로 준 것뿐이죠. 해가 꺼져갈 때, 다닥다닥 산동네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이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 생각은 풍선 바람 빠진듯한 지금의 군산을 보면서, 오히려 더 강렬해지더군요. 골목 어귀에는 말라 붙은 막걸리 냄새가 솔솔 날 것만 같아요. 갈치속젓을 안주 삼아서, 평상에서 막걸리 한 사발 하고 싶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내 글이 저의 가루입니다. 인간은 머리털이 빠지고, 살가루가 떨어지면서 수명을 다 하니까요. 저는 글가루라도 조금 더 뿌리고, 이 세상 여행을 마치고 싶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