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오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맛있는 걸 많이 먹겠다는 여행자의 다짐

by 박민우


20190426_082721.jpg 진주 중앙시장, 그냥 이 사진을 올리고 싶었다.


어떻게 그걸 빠트릴 수가 있어? 짐을 쌀 때마다 느끼는 공포다. 공항에서 혹은 여행지에서 사색이 된다. 그걸 안 가져왔다니... 그런 필수품. 집에 다시 가야 하나? 돌이켜보면 그런 치명적인 순간은 없었다. 꿈에서만 일어난다. 심장이 철렁,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꿈에서 나는 늘 쫓기고, 시험을 망치고, 큰 병이 걸리고, 후회한다. 꿈은 뭘까? 왜 꿈속의 나는 늘 다급하고, 어리석은 걸까? 꿈이 늘 평화롭다면,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공포, 살충제를 싹싹 뿌리고 싶다.

마트에서 소고기를 산다. 해고 아닌 해고 통지를 받은 날 마트에서 한우를 산다. 보통은 닭고기지만, 한우로 산다. 한우가 좋겠다. 마사만 커리를 해드려야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마사만 커리다. 어머니, 아버지도 당연히 이 맛을 알아야 한다. 감자 대신 고구마를 산다. 어머니는 달달한 맛을 좋아하신다. 직장을 잃은 직장인의 하루다. 약간 막막하고, 약간 홀가분하다. 주위를 감싸는 기운이 갑자기 달라진다. 이런 때일수록 맛있는 걸 먹어야 하고, 이런 때일수록 가족이 가까워야 한다. 마사만 커리는 고구마 때문에 달았다. 아들이 있으니 이런 것도 먹어 본다. 달아도 맛있다. 아버지가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신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절대적 지지와 사랑이 있다. 일방적인 통보와 배신이 없는 세상이다. 새삼 아늑하다.


월요일 새벽 한 시 비행기다. 일요일에 떠난다고 봐야 한다. S7 시베리아 항공 비행기다. 온통 러시아어뿐인 이메일이 온다. 비행기 제때 타라는 안내문일 테지. 해석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악몽과 상당히 유사한 현실이다. 일단 비행기가 뜨는 회사다. 감사하다.


sk텔레콤에 전화를 건다. 서비스 정지를 신청한다. 지금 쓰는 갤럭시 노트 s9은 3년 약정이다. 해지하려면 백만 원을 내야 한다. 백만 원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다. 성능은 굉장하다. 배터리를 하루 안에 다 쓰는 게 불가능한 괴물폰이다. 보조 배터리라든지, 중간중간 충전이 아예 필요 없다. 익숙해지니까 당연해진다. 3년 노예라는 사실이 필요 이상으로 답답하다.


또, 또 뭐를 해야 하지? 책상 위의 근로 장려금 통지서를 뚫어져라 본다. 근로 장려금? 이십 대 청년들을 위한 거 아니었어? 이게 내 이름으로 온 이유를 모르겠다. 통지서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79만 원을 시티은행 통장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부동산이 2억이 넘으면 절반만 준다고 한다. 부모님의 아파트는 내 명의로 되어있다. 2억은 넘을 것이다. 반만 줘도 거의 40만 원이다. 지지리도 돈 못 벌면 이런 선물도 온다. 소득세 신고도 이참에 한다. 전화로 가능하다. 18만 원을 돌려받게 된다. 전화 두 통으로 60만 원이 생겼다. 조지아 골방에서 해리포터를 능가하는 소설을 쓸 참이었다. 절박함은 갤럭시 노트 배터리보다 강하니까. 대한민국 국세청은 천하를 뒤흔들 소설을 이런 식으로 날렸다.


-돈이 떨어지면 꼭 연락해요. 오빠.

-300만 원 정도는 언제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작가님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 사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내게 맞는 옷이다. 아슬아슬은 위기가 아니라 활력이다. 순도 높은 에너지다. 더 잘 먹고 다닐 것이다. 내 수중에 얼마 있더라? 두렵고, 철렁할 것이다. 마침내 고른 눈 앞의 비싼 음식은 내 용기의 산물이다. 행복하겠다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경건하게 삼킬 것이다. 위가 형편없이 약해졌으니, 꼭꼭 씹어 삼킬 것이다.


짐을 싸서 집을 나온다. 방배동 후배 집에서 잔다. 일요일 강남에서 점심 약속도 있고 해서, 하루 먼저 나온다. 버스 정류장까지 동행하려는 어머니를 강력히 말린다. 엄마 사랑해, 볼 뽀뽀. 이런 걸 해야 할까? 아끼면 후회가 되는 것들. 그중 '표현'이 있다. 도저히 못 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볼 게 별로 없다는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시작이다. 별 거 없다는 걸 알았다. 큰 소득이다. 나는 좀 더 안정적으로 실망할 것이다. 수도 바쿠(Baku)에서 5일을 머무른다. 일단 5일이다. 5일이 부족할까? 넘칠까? 아니다 싶으면 곧장 메인메뉴로 갈 것이다. 조지아 트빌리시가 메인메뉴다.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는 단계는 필요 없다. 오히려 그런 단계가 식상하다. 가장 맛있는 걸 내내 먹겠다. 그것마저 식상해지면 오겠다. 성큼성큼. 거침없는 자가 되겠다. 내 여행을 온전히 지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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