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저주, 비행기는 셀프

나는 너에게 쌍욕할 권리가 있다

by 박민우


"이르쿠츠크에서 짐 한 번만 찾으시면 돼요."




새벽 한 시 비행기였다. 새벽 두 시쯤 기내식이 나왔다. 역류성 식도염일 경우 야식은 자살 행위다. 기내식은 항암치료 중이어도 먹어야지. 자살하는 심정으로 먹겠다. 게다가 못 눕잖아. 먹고 바로 눕기. 역류성 식도염의 또 다른 자살행위. 이코노미 석은 좁아터진 감옥이다. 석고로 발라진 미라가 되어야 한다. 못 누우니까 먹어도 된다. 기내식은 사랑이고, 종교다. 차가운 버터를 빵에 억지로 비비는 순간과 요거트, 키캣 초코바, 젤리류의 싸구려 후식을 좋아한다. 테이스터스 초이스의 쓰디 쓴 커피를 덜컹덜컹 난기류 속에서 마시는 걸 또 좋아한다. 5시간 정도 탔나? 착륙이 꽤나 울퉁불퉁. 그런데도 눈이 안 떠진다. 새벽 두 시의 과식은 나를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짐은 찾아야 해. 비몽사몽이어도 짐은 명심하고 있다.




"짐은 여기다 두세요."




이르쿠츠크 공항, 느려 터진 컨베이어 벨트를 노려본다. 빨갛고, 낡은 캐리어를 잡아챈다. 어디다 놓지? 두리번, 두리번. 유니폼을 입은 러시아 여성이 나를 부른다. 자기 앞에 놓으란다. 이게 끝? 하라는 대로 한다. 찜찜하지만, 몽롱하다. 한국에서 한 번, 러시아에서 두 번. 총 세 번 비행기를 타야 한다. 짐과 헤어지자 갑자기 대합실이다. 남루한 차림의 사내들이 우글우글. 일반적 공항 풍경이 아니다.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 같다. 안 보는 척, 나를 뚫어져라 본다. 한쪽엔 줄이 길다. 터키의 휴양도시 안탈리아로 가는 비행기다. 여행자와 노동자가 섞여 있다. 이 비행기 다음이 내가 탈 비행기인가? 인천공항에서는 짐만 찾으면 된다고 했다. 따로 입국 수속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미국, 캐나다, 중국은 연결편이어도 새롭게 입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르쿠츠크 공항은 소도시 버스 터미널보다도 작다. 항공사 직원 말대로, 기다리면 될 일. 안탈리아 비행기 뜨고 나면, 노보시비르스크 비행기다. 노보시비르스크. 이런 이름을 외우다니. 나는 점점 더 대단해지고 있다. 새로운 시베리아란 뜻의 도시. 듣도 보도 못한 시베리아 어딘가로 날아간다. 안 가 봤지만, 평생 안 가보고 싶다. 안탈리아로 가는 이들의 줄이 짧아진다. 이 거지 같은 공항에서 곧 지중해의 넘실넘실 바다로 날아 간다. 그들이 느낄 말도 못 할 경이로움에 나까지 흐뭇해진다. 인천 공항에서 함께 비행기를 탔던 사람들이 안 보인다. 다들 이르쿠츠크가 목적지였나? 바이칼 호수가 있는 도시다. 막연하게 꼭 가보고 싶은 곳. 한국 사람이 한 명 보인다. 나랑 같이 짐을 찾고, 같은 곳에 놔둔 사람이다. 시선을 피한다. 그도 마찬가지. 말을 걸면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눈을 피하고, 대화를 차단한다. 심란한 상황이다. 누구에게든 비우호적이고 싶다.




"노보시비르스크 가나요?"




경찰에게 물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 모든 안내문은 암호 같은 러시아어. 넋 놓고 있는다는 건, 불행의 타조알을 부화시키는 것.




"잠시만 기다려요."




몸집이 작은 딸아이와 함께인 젊은 엄마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다. 좀 심각해 보였다. 경찰은 그걸 봐주고 있었다. 사인이 끝나고, 젊은 엄마는 체크인 줄에 선다.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다. 경찰은 나와 멀어지더니, 짐 검사를 하는 쪽에서 약간 무의미하게 서 있는다. 응? 기다리라며? 나를 잊었니? 눈을 마주치려 해도, 그는 어떻게든 무책임하다.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른다. 나처럼 숙련된 여행자는? 이 젓갈 같은 러시아는 내가 안중에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연결 편을 타야 할 경우, 당연히 항공사 직원의 안내가 있어야 한다. 85,000원 무사히 삥 뜯은 씨이바아리아 항공은 그딴 거 없다. 나는 질척대는 옛사랑이다. 나 하나 제거하면 기내식 한 그릇 굳니? 내 자리 반값으로라도 팔게? 나는 항공권을 들고 공항에 어슬렁대는 사람 셋에게 물었다. 그중 둘이 바깥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빌딩, 빌딩!"




덩치 큰 러시아 남자가 빌딩이라고 했다. 다른 빌딩? 다른 빌딩이라니? 30분 안에 비행기가 뜬다. 나는 공항 건물을 나온다. 5월이지만, 2월의 바람이다. 그래서 이르쿠츠크 사람들은 안탈리아로 간다. 없는 봄을 만나러...비행기는 30분이면 뜬다. 새롭게 체크인까지 해야 한다. 시베리아 항공사 직원은 짐만 제대로 부치면 된다고 했다. 대충 대답하면, 사람들은 대충 알아서 탄다.그걸 못 해낸 자들이 이르쿠츠크의 싸구려 방에서 쪽잠을 잔다.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피눈물을 흘린다. 묘지 같은 도시에, 형벌 같은 바람이다. 잠시 거쳐가는 시베리아에 몸서리가 처진다. 그 누구도 시베리아 항공으로 아제르바이잔에 가지 마시오. 꼭 필요한 교훈을 주기 위해 내가 뛴다. 무사히 비행기 타기. 러시아에서는 쉽지 않다. 나는 어떻게든 이 모든 장애물을 넘고 말겠다. 아제르바이잔에 닿고 말겠다. 속도를 높여서 뛰지만, 차분하라. 위기가 내 영혼을 갉아먹기 전에 콧노래라도 부르라. 이 모든 장난에 말려들면 안 된다. 속아 주는 척 정도면 충분. 콧노래를 부르라니까. 똥줄이 타들어갈수록, 노래가 있어야지. 고통의 끝은 시다. 잠깐의 깨우침이 왔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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