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는데 6개월은 걸린 것 같아요. 진도가 안 나가더라고요. 1회를 끝마치기가 힘들었어요. 그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에 숨이 막히는 거예요. 기대가 되어야 보죠. 지안(아이유)과 박동훈(이선균)의 로맨스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피하고 싶었어요. 설득당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늙다리 남자들에게 헛물켜며 살아라. 젊은 여자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인가?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여자들의 반감이 심했던 것도 이해되더라고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끈질긴 공격은 최고의 연애법. 이런 공식의 꼰대 드라마라면 여자들에겐 거부감이 들 수밖에요. 성희롱, 성폭력 안 겪어본 여자가 지구상에 있기는 하나요?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라고 너무들 그러니까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딱 2회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끝까지 봐야겠구나. 고비를 넘겼더니, 너무 대단한 드라마가 저를 기다리더군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고아나 다름없는 이십 대 초반의 이지안은 박동훈에게 접근해요. 사채 빚에 쫓기고, 그래서 얻어터지고, 할머니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천만 원 제의를 어떻게 뿌리치겠어요? 그래서 박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장치를 깔아요. 계약직이지만 엄연히 박동훈이 뽑아 준 건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죠. 박동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면서, 이지안은 위로받고, 치유돼요.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말죠.
박동훈의 삶도 이지안보다 나을 게 없어요. 대기업 부장이면 뭐해요? 아내가 변호사면 뭐하나요? 아내는 남편의 후배와 바람이 나요. 그 후배는 회사에선 오히려 상사예요. 대표 이사거든요. 선배 아내와 바람난 주제에, 껄끄럽다는 이유로 자르고 싶어 하죠. 그래서 이지안에게 흠집을 찾아내라고 해요. 못 찾으면 만들어서라도요.
사실 이 드라마도 찬찬히 뜯어보면 막장 줄거리에,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이기만 해요. 아내가 바람난 걸 알아도 꾹 참고, 동훈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하죠. 현실적으로 그런 가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철천지 원수인 대학 후배와 바람이 났다면 또 다른 얘기죠. 셋 다 대학 선후배 사이라고요. 그걸 눈 질끈 감고 없는 걸로 할 수 있는 남편이 지구상에 존재할까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는 해도, 꾸준히 호감을 표현하는 여자에게 선 제대로 긋는 남자도 얼마나 되겠어요?
이 드라마는 판타지 자체예요. 무명의 감독에게, 무명이지만 완벽한 외모의 여배우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요. 무슨 삼 형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고, 술 마시고, 공을 차나요? 오십이 다 되어가는 삼형제가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아이의 할머니 장례식에 조기 축구 전원이 참석해요. 2박 3일을 함께 해줘요.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죠. 하지만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아요. 시비 걸고 싶지 않아요. 아니, 이 판타지는 꼭 응원하고 싶어져요. 가난하고, 만만하지만 끝없이 따뜻하게, 가족다운, 동지다운 삶으로 늙어가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꼭 살았으면, 존재했으면. 그렇게 간절히 바라게 돼요.
이지안과 박동훈, 둘은 사랑했어요. 아주 찐하게요. 하지만 선을 넘지 않아서,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죠. 갑자기 딥키스만 했어도, 이 드라마는 쓰레기 됐어요. 비현실적이어서 살아남은 드라마죠. 하지만 둘의 정신적 사랑은 완벽한 불륜, 그 자체예요. 거의 물체에 가까운, 아무런 느낌도 없는 서로에게 자신의 상처를 들켜가면서, 다가가요. 끝없이 배려해요. 끝없이 응원해요. 박동훈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이지안도 키다리 아저씨였어요. 서로를 지키는 절대적인 수호신이 되죠.
어떻게 허술한 에피소드가 단 한 회도 없나요? 이렇게 흐르겠지? 뻔한 방식을 놔두고, 허를 찌르면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해요. 작가가 일방적으로 대본을 주는 건지, PD와 함께 만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 에피소드가 완벽하게 똑 떨어져요. 끝으로 간다고 힘이 빠지거나, 떡밥 회수 못 하는 흔한 한국 드라마의 약점이 없더군요. 빨리 끝내고 좀 쉬자. 창작자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 드라마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지더군요. 푹 빠져서 캐릭터들과 교감하는 창작자가 느껴져요. 끝내고 싶지 않고, 머물고 싶은 자신만의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해냈어요.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신들린 드라마예요. 창작자가 진정한 의미의 신이 되어서, 피조물과 영원한 결속을 약속해요. 그러니까 겉돌지 않고, 꽉 찬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거죠. 이런 무게감의 드라마는 지금 현재로는 한국만 만들 수 있어요. 어떻게 함부로 자신하냐고요? 그러게요. 스케일이 큰 드라마는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런 나라들은 인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인간의 이해가 깊은 각본이 나오면, 스태프들과 자본이 그걸 뒷받쳐 주지를 못 해요. 다른 나라 드라마들은요. 한국은 끝까지 가는 지독한 인간들이 드라마판과 영화판에 있어요. 많지는 않아도요. 그 창작자들의 일상은 황폐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작품에 몰입하는 똘끼 충만 예술가들이 현존해요. 시청자에겐 큰 행운인 셈이죠. 창작자들은 좀 많이 괴롭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아이유와 이선균의 연기도 놀랍기만 하더군요. 그냥 막 지르고, 우는 연기가 아니어서 더 놀라워요. 극단적인 감정 표현이야 몰입하면 가능하지만, 농도 조절은 꾼들이 해내는 거거든요. 그런 정적인 연기는 사실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많죠. 대놓고 악녀, 대놓고 사이코패스들이 연기의 신이라는 칭찬은 다 뺏어가죠. 아이유나 이선균은 누가 봐도 답답한 캐릭터로 시청자를 설득해야 했어요. 그 어려운 걸 해내더군요. 아이유는 정말 뭔가요?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이 두 개를 정복한 연예인 중에서도 최고 중의 최고 아닌가요? 이런 드라마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많으면 귀한 줄 모르니까요. 보는 내내 행복했어요. 역대급 인생 드라마였습니다. 한국 드라마 만세, 넷플릭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