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커피는 금기의 음료였어요. 마시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 중학교 중간고사 기간에, 잠 좀 덜 자 보겠다고 커피 한 잔 타 마시고는 밤새 잠이 와야 말이죠. 기술 시험을 커피 덕분에 거하게 망쳤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커피, 크리머, 설탕을 다방 커피 공식으로 마셨어요. 티스푼으로 두 개씩 넣으면, 딱 먹기 좋은 맛이 났죠.
미국에 사는 외삼촌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는 아침부터 커피를 찾는 거예요. 설탕과 크리머는 절대 넣지 말고, 커피만 타래요. 부부가 너무나 우아하게 마시는 거예요. 속으로 비웃었죠. 누가 보면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인 줄 알겠네. 미국에서 십 년 넘게 살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 검은 가루 물을 무슨 맛으로 마셔? 사대주의에 빠진 불쌍한 한국인의 미국 따라하기로 보였어요. 대단한 억지이자, 소중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행위 아닌가요? 설탕도, 크리머도 없는 검은 액체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시는 거냐고요?
캔커피가 나옸을 때는, 세상 막장이구나. 보나 마나 망하는 아이템이다. 생수(진로 석수가 페트병으로 나왔을 때였을 거예요)와 캔커피는 시대착오적인 기괴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공짜로 주는 보리차가 널렸는데, 누가 돈을 주고 맹물을 마실까요? 캔커피도 그래요. 가루 물에 넣고, 녹이는 게 얼마나 귀찮다고 캔커피를 사마시냔 말이죠? 국민배우 안성기가 그려진 커피 캔을 보면서, 이러다가 안성기까지 욕먹겠구나. 어린 나이에 배우 걱정이 다 되더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도 사 마시는 거예요.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거죠. 국민학교 5학년의 냉철한 시장분석은 그렇게 상처를 받고 말아요.
다방은 제가 그 누구보다 먼저 갔을 거예요. 우유배달은 보통 새벽에 이루어져요. 새벽 배달을 끝낸 아버지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셔야 해요. 낮 배달은 형이나 제가 할 때가 많았어요. 주로 다방이었는데, 얼마나 가기 싫었겠어요? 친구들에게 배달하는 거 들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는데 말이죠. 그래도 다방 안에 들어가면, 그렇게 신기하더라고요. 커다란 어항에서 물고기들이 흐느적, 흐느적, 쌍화차 냄새와 담배 연기가 참 몽환적이었어요. 어른 공간에 꼬맹이가 입장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르시죠? 그때 MJC 커피가 있었어요. 그 회사 주황색 보온병이 집집마다 있었어요. 다방에도 물론 이 보온병이 많았죠. 어린 저는 다방이 장사가 되는 것도 이해가 안 갔어요. 집에서 타 마시는 커피를 왜 여기까지 와서 타 마실까? 어항 옆에서, 커피를 마시면 더 맛있나? 가끔 마담 아주머니가 향긋한 코코아나 율무차를 타 주셨어요.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카페라는 걸 알게 돼요. 자뎅이나 캐스팅, 글로리아 진스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를 가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나도 어른이다. 나도 도시남자다. 이런 느낌요. 파르페에 우산 꽂아주는 곳은, 프랜차이즈 카페들에 비해선 좀 촌스러운 카페였죠. 그때 보디가드라는 전국을 뒤흔든 초상류층 카페가 압구정동에 문을 열었어요. 왜 초상류층 카페냐면,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있었거든요. 삐삐 확인하려면 공중전화 찾아다니는 시대에, 테이블 위에 공짜 전화기가 있는 거예요. 다리 꼬고, 그 자리에서 삐삐 확인하는 그 스웩, 그 플렉스는 진짜 어마어마했죠. 연예인, 강남 오렌지 족은 다들 보디가드로 몰려들었어요. 그 엄청난 카페가 고대 안암동에도 문을 열어요. 연세대가 있는 신촌도 아니고, 왜 고대에? 천박한 자본주의는 물러나라? 그래 봤자 카페일 뿐인데, 고대생들은 그 앞에서 '보디가드 카페 반대 시위'를 해요. 결국 카페는 '목신의 오후'라는, 말도 안 되게 문학적인 이름으로 탈바꿈하고는 곧 망하더군요. 그때 고대생들 대단했어요. 맥도널드도 못 들어오게 시위를 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니?라고 물을 용기는 없고, 조용히 가서 빅맥 먹고 했네요. 코카콜라는 마시면서, 맥도널드만 미워하는 건 어쩐지 형평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세게 테마 기행' 콜롬비아 편을 찍으면서, 살렌토라는 마을을 가요.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죠. 원두를 따서 말리고, 볶고,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주는 원초적 커피를 마시면서 삶의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뭉클하더군요. 원래의 커피와, 내가 마시는 커피는 뿌리가 같을 텐데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전 세계를 떠돌면서, 이런저런 커피를 마시게 돼요. 남미는 설탕만 넣은 다디단 커피를 많이 마셔요. 콜롬비아 보고타에 가면, 커다란 커피통을 등에 짊어지고 길에서 팔아요. 호스를 통해서 커피를 따라 줘요. 커피 원액에 설탕만 탄 거예요. 우리는 돈 준다고 해도 안 마실 커피죠. 원액과 설탕만 들어간 커피는 한국인 기준으로는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콘셉트죠.
터키는 원두를 거르지 않고, 가루 째 마셔요. 가루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마시는 거기는 한데, 가루가 입으로 안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장 안 좋아하는 커피예요. 카페 문화는 터키가 원조라는 거 아시나요?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죠. 그 이후 유럽에서, 카페가 붐을 일으키고요. 중동 지방의 커피 사랑은 대단해요. 음주를 금하니까, 술 대신 커피를 애용해요. 지금은 갈 수 없는 나라가 된 시리아에서 깜짝 놀랐어요. 초라한 구멍가게에도 어엿한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거예요. 맛도 좋은데, 오십 원, 백 원에 제대로 된 커피를 팔더라고요.
공복에 아메리카노가 한 때는 삶의 낙이었어요. 미국병에 걸린 삼촌을 욕할 때는 언제고, 제가 언제부터인가 단 맛도 없고, 우유맛도 없는 검은 액체에 푹 빠져 살고 있더라고요. 쓴맛 뒤로 나오는 고소함, 상큼함, 단맛이 어른이 되니 느껴지더라고요. 소중한 향에 누가 될까 봐 설탕이나 우유를 타지 않게 되는 거죠. 원래의 맛이, 가장 훌륭한 맛. 식도락가들이 강조하는, 원재료의 가치를 커피를 통해 깨닫게 돼요. 에휴, 그러면 뭐 하나요? 이젠 커피 못 마셔요. 역류성 식도염이 심한 편인데, 커피만 마시면 속이 뒤집어지더라고요. 그나마 디카페인 커피 마시면 괜찮고요. 근사한 취미 하나를 잃었어요. 공복의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제 여행의 상징과도 같았거든요.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에서, 낯선 아침 공기에 커피 향을 섞어 들이켜는 그 순간이 이젠 불가능해졌어요. 그래도 차는 마실 수 있으니까요. 커피의 아쉬움을 차로 달래며 살아야죠. 커피를 마음껏 즐기실 수 있는 분들 좋으시겠어요. 솔직히 샘나요. 샷까지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이 그렇게나 부러울 수가 없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모르는 내일이 있고, 모르는 세상이 있어요. 나만 모른 척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여행이에요. 일상은 여행이에요. 모른 척하지 말고 살아요. 세상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놀이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