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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y 17. 2021

굴욕감과 자존심 사이 - 비루함이 아니라, 삶이다

먹고사는 일에 굴욕은 없다

잡자사 기자일을 그만두자마자, 프리랜서 일을 했어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프리랜서라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기자들이 하는 일을 나눠서 하는 거죠. 일감을 주면 무조건 감사해야죠. 잡자사 후배들이 여기저기 옮긴 덕에, 일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어요.


-선배, 미안한데요. 편집장님이 수정을 좀 해달라고 하시네요.


그럼요.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이래야 되는데요. 사실 교정을 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아요. 무능력을 들킨 것 같기도 하고, 후배에게 결재를 받는 상황도 서글프고요. 힘들게 수정해서 보내 줬더니 보판이 돼요. 보판이라 함은, 기사가 미뤄지는 걸 의미해요. 다음 달에 실릴 수도 있지만, 아예 안 나갈 수도 있어요. 여러 사정으로 보판이 되는데, 쓴 사람 입장에선 내 글이 시원찮은가 보다.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어요. 원고료는 지급이 돼요. 자존심에 상처만 받을 뿐이죠. 잡지사 일이 힘들다고 그만둔 주제에, 그렇게 후배들이 주는 허드레 일로 먹고살았어요. 허드레 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정직원 기자 놔두고, 프리랜서에게 톱스타 인터뷰를 맡기겠어요? 이효리 화보를 맡기겠어요? 손 많이 가는 거, 덜 중요한 거, 정직원들이 하기 껄끄러운 것들이 프리랜서 일감이에요.


저에게도 까마득한 선배가 홍보사를 차렸더라고요. 보통 기자들은 편집장이 못 되면, 홍보 기획사를 많이 차려요. 인연을 맺은 화장품 회사나, 패션 업체들의 홍보를 대신해 주는 거죠. 홍보의 기본은 잡지사를 돌며 명함을 돌리는 거예요. 홍보사를 차린 대선배가 우리 잡지사 막내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 거예요.


-OO 기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순간적으로는 얼음이 됐지만, 확실하게 공사를 구별하는 선배가 멋지더군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현실을 제대로 마주해야죠. 까마득한 막내였어도, 일로 만났을 땐 고객이니까요. 오히려 일 처리할 때,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될 일이 없게 돼요. 먹고사는 게, 누구라고 쉽겠어요?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이면, 그런 설움 없을 것 같다고요? 또라이 총량의 법칙 아시죠? 상관이 인격자인 경우가 많겠어요? 또라이인 경우가 많겠어요? 사회생활 오래하신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죠. 비참함을 굳이 드러낼 필요 없으니, 다들 숨어서 삭이는 거죠. 어머니가 보험회사에 취직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친척들 방문이었어요. 문전박대 수준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온 적도 있대요. 보름달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그래도 실적 올리려고 다른 친척집의 문을 두드리는 거죠. 내 새끼들 문제집 사줄 돈만 벌었으면. 어머니의 꿈은 소박했지만, 그 소박함을 이루기 위해선 눈물 젖은 빵을 드셔야 했죠.


저 사람 자르라고 했던 대기업 홍보팀 직원이 기억나요. 건설회사 브로셔 작업 중이었는데, 제가 쓴 문구들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다른 출연자랑 왔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런 말을 했던 여행 프로그램 PD도 기억해요. PD가 출연자가 됐어야지. 인물로 보나, 뭐로 보나 출연자보다 낫구먼. 그런 이야기를 면전에서 대놓고 했던 통역(현지 코딘네이터)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두고 봐라. 보란 듯이 성공해서, 당신들과 급이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겠다. 유치하게 이를 악물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때의 제가 그냥 딱해요. 자신감이 없을수록, 몸부림을 쳐요. 발끈해요.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치명타에 급소를 맞고 허우적대요.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고, 내가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고 싶어요.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게 감정을 소모할 만큼의 치명타도 아니었어요. 저는 그럭저럭 잘 살게 되더라고요. 멱살을 잡는다고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게 사과를 받는다고 더러워진 기분이 말끔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먹고사는 일이 그래요. 상처도 줄 수밖에 없어요. 즐겁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생계를 책임지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피할 수 없고, 견뎌야만 하는 덫과 같은 거예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일로 안 엮이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천사가 됐을 거예요. 먹고사는 일에서, 천사를 바라지 마세요. 애초에 불가능하니까요. 내 입에 풀칠하는 것, 그게 그냥 선이고, 가치예요.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이에요.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선, 때로는 개처럼 기어야죠. 나라는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처럼 대단한 게 어디 있나요? 그러니 시달린 자신을 토닥여 주세요. 그렇게라도 버텼다. 해냈다. 자신을 쓰다듬어 주면서, 시원하게 마시는 맥주 한 캔이 득도고, 복수죠. 나로 돌아와서, 넷플릭스라도 요리조리 돌려보는 시간을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린 신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에요. 화도 낼 수 있고, 후회할 행동도 해요. 그래도 화를 낸 자신이, 진짜 자신은 아닐 거예요. 좀 더 나아지려고, 성장하려고 순간순간 멈추고, 다치는 거겠죠. 그러니 불완전함을 불안해하지 말기로 해요. 애초에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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