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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y 28. 2021

여행이 내게 가벼워지라고 한다

소유의 무의미함을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는 길 위의 공부

십오년 전 키르기스스탄에서 일본인 친구 카즈마와 

여행 초반에 저도 짐 욕심 만만치 않았죠. 누가 젓갈을 1킬로 이상 싸갈까요? 그것도 배낭여행자가요. 경험이라는 게 있어야 짐 욕심도 조절하죠. 맨땅에 헤딩하기였어요. 인생 첫 배낭여행이 게다가 남미였고요. 1년 넘게 있을 건데, 젓갈을 못 먹는 날이 훨씬 많을 텐데, 넉넉하게 가져가면 두고두고 행복하겠지? 그래서 오징어 젓, 창난젓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요. 열심히 잘 먹기는 했지만, 금방 먹어 치울 수 있는 음식이 아니잖아요? 나중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미의 태양 아래서 덥혀지고, 삭아지고, 수상해졌죠. 형체까지 일그러진 젓갈을 입에 털어 넣게 되더라고요. 그 귀한 걸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추울까 봐, 배고플까 봐, 심심할까 봐 짐이 불어나요. 전 세계 어디든 초대형 마트 없는 곳이 없는데도요. 한국에서 못 가져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죠. 제 짐에 있었던 엽기적인 아이템이 또 뭐가 있었더라? 네, 김 백 장 한 묶음을 그대로 가져갔어요. 가져가서 식용유 바르고, 소금 뿌려서 구워 먹었죠. 김을 굽다 보면 김가루가 바닥에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세 들어 살던 집주인에게 엄청 혼났어요. 배고플 때 급하게 먹을 수 있는 미숫가루도 큰 걸로 한 봉지 담아 갔으니, 짐이 아니라 살림이었죠. 이동할 때마다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했겠어요? 결국 못 먹고 버릴 때, 자괴감이 어찌 안 들 수 있겠냐고요? 추울 때 대비해서 내복도 사 가지고 갔는데, 꼭 그랬어야 했냔 말이죠. 재래시장에서 아디다스 짝퉁 트레이닝 바지 하나면 되는 건데요. 


짐에 대한 욕심이, 우리 삶에 대한 욕심이에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죠. 우리는 두려움으로 소비를 해요. 집도 그렇지 않나요? 나중에 안 팔릴까 봐, 나중에 후회할까 봐 빌라는 안 돼요. 애들이 뛰어놀 공간이 부족할까 봐, 추울까 봐, 더울까 봐 신축 아파트를 선호해요. 그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너무 절대적인 건 그것대로 위험하죠. 집 때문에 결혼하고, 집 때문에 이혼해요. 캠핑 욕심도 비슷해요. 정작 가서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일단 사놓기 바빠요. 실용적인 건 개나 주라고 하세요. 남들이 쓰면 다 좋아 보이는 법이죠. 안 쓰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사요. 살 때 진짜 기분 좋거든요. 접으면 작아지는 탁자에서 밥 먹을 생각만 해도 괜히 흐뭇하고, 접이식 경량 의자에 앉아 쿨러에서 꺼낸 맥주 마시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다 저리죠.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 느낌이 좋아서, 마구 사다 놓는 거죠. 


문제는 '상상 헛배부름'이 용도의 대부분이라는 거죠. 방치되는 애물단지들이 더 많죠. 진짜 현자라면, 사지도 않고 샀다고 믿는 거예요. 만족하고, 후회하고, 처분해요. 머릿속으로만요. 그 어떤 쓰레기도 안 나오는 무공해적인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죠.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사지도 않고, 샀다는 상상을 어떻게 하냐고요. 그래서 돈을 쓰고, 후회하고, 똥값에 처분해요.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그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무거운 여행 짐을 내내 저주했더니, 그것도 나름 공부가 되더라고요. 짐의 무게를 절반으로 줄였어요. 추우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요? 싸구려 재킷이나, 두툼한 수면 양말을 사면 되죠. 배고프면 어떻게 하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바나나는 있어요. 배 불러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봤지만, 굶주림에 몸부림치는 여행자는 단 한 명도 못 봤습니다. 두려움은 늘 과장된 거짓말로 저를 조종하려 들어요. 그 두려운 상황도 사실은 즐거운 경험인데 말이죠. 너무 추울 때는 촛불의 온기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 배고픔은 앉아서 주로 생활하는 현대인에겐, 사실 돈 주고라도 사야 하는 가치라는 것. 왜 그런 상황을 두려워만 했을까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점점 줄고 있어요. 여행에서도, 삶에서도요. 얼마나 좋은 징조인가요? 공항 수하물용 컨베이어 벨트에서 다들 자기 짐 기다리고 있을 때, 당당하게 출국 수속 밟으러 먼저 걸어가는 여행자가 최고 스웩인 거 아시죠? 손 안의 짐이 전부인 가볍디 가벼운 여행자가 되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삶에서도, 길 위에서도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몸은 작지만 우리의 생각은, 마음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요. 누군가는 그래서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해요. 소우주를 품은 우리가, 몸의 함정에 빠져서 작아지지 말기로 해요. 우리의 무한한 생각으로 세상을 품고, 타인을 품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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