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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y 29. 2021

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지질한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선 작아지는 이유가 뭘까?

트라우마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빌릴 일인가 싶기는 해요. 사전적 정의로는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이라고 쓰여 있네요.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주장했죠. 환영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문득문득 저를 흔들어요. 특히 큰집에 가면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삼 형제 중 막내인데, 큰집, 둘째 큰집 아들이 둘, 딸이 하나고요. 우리 집만 딸이 없었어요. 딸 둘은 여자라는 이유로 인형 놀이나 소꿉장난을 하며 어울렸어요. 남자 형제들은 화약 터뜨리기, 고무줄 총 만들기, 구슬치기 같은 걸 하면서 놀았고요. 제가 가장 나이가 어렸는데, 큰집 장남, 즉 장손인 형이 저만 방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저랑 친형이랑 한 살 차이예요. 못 들어가게 하려면 둘 다 못 들어갔어야죠. 저만 들어오지 말라뇨? 문이 쾅 닫힐 때의 소리가 지금도 생생해요. 큰집은 저에겐 두려운 공간이었어요. 할머니나 큰어머니가 저에겐 엄하셨어요. 일단 저희 어머니가 미운털이기도 했고요. 친정식구들이 단칸방 신혼집에 한 달도 좋다. 민폐를 끼치면서 먹고, 자고 했던 걸 다 들켰거든요. 오죽하면 그 어린 나이에 가출을 했겠어요? 명절이었는데 어머니는 가게 일 때문에 큰집에 못 오셨어요. 엄마 보고 싶다면서 네 살 아이가 큰집을 나간 거예요. 파출소에서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더군요. 그렇게 서러운 아이는 이후에도 늘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가 돼요. 게다가 사촌 형은 가부장적이기까지 했어요. 존댓말을 쓰라는 거예요. 나이차가 많이 나기는 했지만, 저도 호락호락한 아이는 아니라서 왜 형인데 존댓말을 쓰라고 하나? 외삼촌들은 반말해도 뭐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사촌 형이 결혼을 하고, 조카가 태어나요. 명절날 차례가 끝나고, 저는 빈방에서 자고 있었어요. 이제 일곱 살이나 됐을까? 조카가 자고 있는 제 배를 발로 뻥 차는 거예요. 눈이 번쩍 떠진 저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어요. 조카는 울음을 터뜨리고요. 그런 순간 있잖아요. 좀 심했나 싶게 손이 나갈 때요. 그때 형이 빤히 그 광경을 보더니, 조카를 혼내더라고요. 저에게 한소리 할 줄 알았는데요. 조카가 무슨 악의가 있었겠어요? 오히려 감정을 담은 건 저였죠. 위축된 상태에서, 쉽게 적의를 느껴요. 사촌 형과 있으면 억지로 대화거리를 찾아야 해요. 불편하다는 거죠. 


-그 나이 먹고 바람도 안 피우고 대단하세요. 


이 말이 제 입에서 나오고, 저도 믿을 수가 없었죠. 저도 마흔 가까이 됐을 때예요. 한국에 오면 가끔, 아주 가끔 연락을 하고 인사를 드려요. 주로 아버지가 시키시죠. 남처럼 살면 안 된다. 연락도 하고, 만나고 해야 정도 든다. 아버지의 바람이 간절한 걸 아니까요. 사촌 형과 내가 열 살 정도 차이가 날 거예요. 만나면 딱히 할 말이 없어요. 환장하겠더라고요. 차 안에서 괜히 덜 어색한 화제를 찾다보니 실언을 한 거예요. 형수님과 화목해 보이세요. 이러면 될 걸, 바람도 안 피우고, 신기하게 바람직하십니다. 이렇게 내뱉은 거예요. 평소에 가깝게 지낸다면 웃고 넘기죠. 우린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거든요. 형도 얘가 지금 미쳤나 싶은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화를 내더라고요. 차 안의 공기가 무겁고 탁하더군요. 


조카는 글을 쓰며, 여행 다니는 저처럼 살고 싶대요. 저에게 맞은 기억은 없나 봐요. 이젠 키도 더 크고, 나이도 서른인 멋진 어른이 됐어요. 저는 여전히 사촌 형들이 불편해요. 조카는 안 불편해요. 저를 왕따시켜서라기 보다는, 왕따를 당했던 지질한 저를 기억한다는 게 불편해요. 당당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눈알을 굴리던 제가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으면 좋겠어요. 내 지질함을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선 일부러 더 목소리가 커져요. 더 당당하고, 자연스러워지려고 애써요. 그러다 보니 말실수도 늘고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단절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라이벌인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하죠. 스스로가 선택한 감정일 뿐이라고 해요. 내가 왕따를 당해서 형들이 불편한 게 아니라, 형들이 불편하니까 왕따라는 핑계를 끄집어낸다는 거죠. 이렇게 속 편한 주장이 바로 아들러의 이론이에요. 그때 지질함을 왜 지금의 나와 연결시키는 걸까요?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일뿐인데 말이죠. 어릴 때 누구는 얼마나 세련되고, 우아한 시간을 보냈다고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닌데 말이죠. 손발이 늘 터있고, 콧물 자국으로 옷소매는 반짝이고, 버짐꽃이 가득한 꼬맹이 박민우는 진즉에 사라졌는데 말이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린 모두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 시간을 비켜갈 수 없다면, 웃을 수 있을  때 웃고, 노래할 수 있을 때 노래하며 살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홀가분해질 수 있도록요. 


https://brunch.co.kr/@modiano99/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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