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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May 30. 2021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환승 여행의 짜릿함

가진 것이 없을수록, 나의 오감은 무섭게 활성화됩니다

20년 전 런던에서 항공사 직원과 담판을 벌였어요. 오사카에서 며칠 경유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땐 일본 입국이 쉽지 않았어요. 비자가 따로 있어야 했죠. 그런데 환승할 경우 72시간(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네요)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했죠. 


-입국이 안 돼요. 


런던의 일본항공(JAL) 직원은 입국이 안 될 테니, 항공권 날짜를 못 바꿔 주겠다는 거예요. 


-72시간은 입국이 가능하다던데요?

-아니라니까요. 공항에서 그냥 쫓겨난다고요. 

-그럼 쫓겨날게요. 날짜만 바꿔 주세요. 

-하아. 날짜는 바꿔 주겠지만, 입국 거절 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해요. 

-노 프라블럼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일본항공이 대한항공보다 훨씬 저렴해서 1년 오픈으로 항공권을 끊었죠. 돌아가는 길에 오사카에서 환승을 해요. 일본까지 갔는데 공항에서 비행기만 바꿔 타는 게 여간 억울한 게 아니에요. 오사카에서 단 며칠이라도 머무르면, 한 나라를 더 다닌 게 되는 거잖아요. 그때는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한 나라라도 더 가 봤다. 그게 더 중요한 때였어요. 쫓겨날 거라는 항공사 직원의 협박도 무섭지 않더라고요. 실제 입국 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과연 나는 진상 손님이었나? 공항에서 시비라도 붙었으면, 죄책감을 좀 느낄 텐데, 친절하기까지 하더군요. 짧디 짧은 2박 3일 교토를 가고, 런던 어학연수에서 같은 반 친구였던 코코로를 만나 단팥죽도 얻어 먹어요. 코코로는 아주 예쁜 일본 아가씨였는데, 월차까지 내고 저를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더라고요. 나중엔 숙소에 깜빡 잊고 놓고 간 짐도 부쳐줬어요.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죠. 


지금이라면 돈 주고 하라고 해도 안 해요. 그 짧은 시간 보면 얼마나 본다고요. 신기하죠? 그때의 한 시간, 한 시간이 생생해요. 싸구려 료칸이었는데, 목욕탕이 있었어요. 욕조에 뚜껑이 있더군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몸을 담그고, 다시 뚜껑을 덮고, 그 뚜껑 열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가고.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제일 깨끗한 나라는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하는구나. 꺼림칙했지만, 90년대 '일본'이라는 브랜드 파워가 워낙 막강했어요. 뭐든지 신기하고 좋아 보였죠. 교복을 입은 여학생 여럿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은,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어요. 교토에 간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비에 눅눅해진 교토는 그윽하고, 아련하기만 했죠. 싸구려 숙소였는데도, 아침밥도 챙겨 주더라고요. 매실 장아찌에 미소된장국 정도의 단출한 식사였지만, 맛으로 먹나요? 분위기로 먹는 거죠. 골목마다, 집집마다 어찌나 그리 화분들이 많던지. 일본 사람들은 꽃을, 식물을 유난히도 사랑하는구나. 열심히 해석하고, 감탄하기 바빴죠. 


오사카에 한 달 이상 머물 때가 있었는데, 그땐 별 감흥이 없더군요. 2박 3일, 짧은 시간이 힘이었던 것 같아요. 올 수 없었던 곳을 어떻게든 왔다. 그 감격이 저를 열정 에너자이저로 만들었어요. 정해진 시간은 72시간, 후회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 마음으로 허겁지겁 보고, 먹고, 걸었어요. 되돌아갈 수 없는 새것 같은 마음이었죠.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하품을 해도, 졸아도, 넘어져도, 일본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쳐도 저는 쉽게 지나치지 못했어요. 다른 나라니까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어떻게 다른가? 왜 다를까?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느끼고, 반응했죠. 가장 뛰어난 여행자는 처음인 여행자예요. 다시는 오지 못할 것처럼 간절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죠. 제가 그랬어요. 72시간을 몸부림치며 여행했어요. 제 자신이 여행 자체였어요. 여행의 신이었죠. 축복된 시간이었더라고요. 뒤돌아 보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매일 쓰지만, 당연하지 않은 마음으로 쓰고 싶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요. 오사카의 72시간처럼요. 


https://brunch.co.kr/@modiano99/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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