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여자가 침대 보를 씌운다. 곰팡내가 은은하다. 내내 빈방이었구나. 머리숱이 거의 없는 남자가 아귀힘을 꽉 주며 악수를 한다. 여자가 문을 닫으라고 한다. 모기가 들어오니까요. 몸짓만 봐도 알겠다. 로라네 게스트 하우스. 에어비엔비는 원래 쓰던 방을 빌려주는 서비스다. 이름이 필요 없다. 그런데 왜 로라네 게스트 하우스지? 부킹닷컴(Booking.com)에도 이름을 올렸다. 양다리를 걸쳐서라 돈을 벌고 싶었으면, 나한테도 좀 잘하지 그랬어. 좁은 방으로 묵직한 탁자를 들여놓고(내가 거들었다), 마당의 기다란 그네 의자에 커버를 씌운다. 비가 오는 중이다. 두툼한 그네 커버기 빗물을 쭉쭉 빨아들인다. 갑갑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로라'로 추측되는 여자가 베개 커버를 씌우는 동안 남자는 주방을 보여준다. 손님용 주방은 마당에 붙어있다. 테이블도 여러 개다. 화분과 나무가 적당히 채워진 예쁜 마당이다. 사흘 자는 손님 한 명에겐 과분하기만 하다. 남자는 갑자기 푸틴 욕을 한다. 조지아와 러시아 사이가 이렇게 된 건 푸틴 탓이다. 성수기 7월에 손님은 꼴랑 한 명.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바투미를 알려면 일주일은 있어야지.
일종의 구애다. 메시지를 씹고, 오거나 말거나 맥주 좀 마시다 잠들었을 남자는 나를 붙잡고 싶다.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 존재는 이토록 달라진다. 나의 짜증과 분노는 또 어디로 간 걸까? 잠자리가 해결됐다. 5분 전까지의 심리 상태는 쓸모없다. 피곤하면 피곤한 대로, 짜증 나면 짜증 나는 대로 반응할 뿐이다. 지금은 '안도'라는 반응을 한다. 늦었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지만, 먹고 싶다. 글자와 문명을 습득하는 동안 인류는 기형적인 식습관을 갖게 됐다. 배가 고프다는 신호는 없는데, 먹고 싶다. 과식을 하면 후식이라도 먹고 싶다. 후식이라니.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자학. 밤이 깊었지만, 다 귀찮지만 굳이 슬리퍼에 발가락을 밀어 넣는다. 300미터 정도 걸어서 작은 가게를 발견한다. 무게로 파는 포장지 없는 웨하스를 산다. 그게 밥이야? 밥이다. 욕망은 어디서 올까? 출처를 알고 싶다. 밤 열한 시 토끼처럼 오독오독 웨하스를 씹는다. 처음 세 개만 맛있다. 끝까지 탈탈 먹는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서 러시아 글자가 새겨진 팔도 도시락 면을 먹고, 잔다. 자다가 보니까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다. 잔다. 아침까지 잔다. 이틀이 지났다. 아르메니아에서 조지아로, 트빌리시에서 바투미로. 총 열세 시간을 버스에서 시달렸다. 피곤할 만도 하지. 예레반 기차역에서 만났던 창백한 폴란드 청년이 떠오른다. 탈수증으로 끙끙 앓던 그는 예레반을 저주했다. 인도 함피에서 만났던 크로아티아 여자도 떠오른다. 그녀도 함피를 저주했다. 배탈로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몸이 만신창이면 다 싫다. 멕시코시티나 칠레 아타카마 사막, 이구아수 폭포는 내가 저주하는 곳이다. 시름시름 열병으로, 배탈로 껍질만 둥둥 떠다니며 봤던 풍경이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아프지 않았을 때 보았던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콜롬비아의 살렌토가 앞자리다. 나의 좋고 싫음은, 당신의 좋고 싫음은 참, 참 허접하다. 그래도 부지런히 좋아하고, 싫어해야 한다.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 진동하는 거라 믿는다. 지금 내 눈엔 바투미가 지루하다. 피곤이 가시길 기다린다.
방에서도 바다가 보인다. 석양을 기다리며 온 가족이 돗자리를 폈을 그곳을 이틀째 가지 않다니. 5분이면 닿는 거리다. 대신 유튜브로 신곡을 듣고, 옛날 드라마를 본다.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쉽게 가자. 쉽게 가지 못하고 있다. 찍어놓은 영상들을 모으고, 자르고, 음악 깔고, 자막 넣고, 더빙만 하면 되는 걸 못하고 있다. 가난한 나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다. 매달리기로 해놓고는, 자꾸 밀쳐 놓는다. 이제는 재미 없어진 영국 남자를 보고, 우울한 뉴스를 찾아서 본다. 내 자유를 방에 가두고, 가위에 눌린다. 빨아놓은 속옷이 없다. 에콰도르에서 산 바람 숭숭 알파카 바지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토마토와 당근을 사러 간다. 이런 사람이었나? 이런 사람이 됐다. 스무 살 때는 자신만만했고, 서른을 앞두고는 모든 게 두려웠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 걸. 머리털이 우수수 빠질 때 밤잠을 설쳐가며 탈모 정보만 모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청담동 피부과에 수백만 원 안 써도 됐을 텐데. 아니지. 그 불면의 밤이, 불안이 나를 남미로 보냈다. 이 샴푸, 저 샴푸 써가며 두피를 실험했다. 폴리젠이라는 샴푸를 찾았다. 내 나약함도 열심히 움직였다.강했으면 좋았겠지만, 나약함도 애써가며 나를 도왔다.
깜빡깜빡
깜빡이는 이유가 문득 궁금하다. 줄곧 눈을 뜰 수 있는 생명체가 될 수도 있었다. 먼지도, 바람도 내내 맞서지 못한다. 꺼풀의 보호 아래 잠시 보고, 닫는다. 창문으로 그네가 보이고, 전깃줄이 보이고, 너머, 너머에 손바닥만큼 바다가 보인다. 그렇게 자주 깜빡이지만, 어둠은 기억에 없다.
깜빡깜빡
보겠다는 걸까? 보지 않겠다는 걸까? 갈피를 못 잡는 걸까? 둘 다 원하고, 둘 다 힘들다. 바투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이 방이 전부다. 300미터 떨어진 가게가 전부다. 오래 있게 될까? 왠지 그럴 것 같다. 바투미는 내일부터 놀라울 것이다. 이 뻔한 지겨움이 증거다. 내 변덕을 분석이라 착각한다. 늘 틀려왔다. 그러니까 바투미는 굉장할 것이다. 무기력하지만, 기다린다. 감고 싶지만, 뜬다. 뜨고 싶지만, 감는다.
깜빡깜빡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낮게, 천천히 닿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우주입니다. 저는 무중력으로 우주를 날아요. 그런 상상으로 씁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