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케이크를 한 번에 먹은 사연
인사라도 할까?
손님방이 있는 곁 마당을 지나 우회전, 본 마당을 지나서 현관을 똑똑똑. 뭘 또 그렇게까지. 그냥 가자. 인사는 생략. 내내 내 문자를 씹었던 사내다. 삐졌냐고? 삐졌을 리가... 인사를 안 해도, 그런가 보다 할 사람이란 얘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면 커튼부터 닫았다. 방이 훤히 보이는 데다가, 도시락 면을 먹는 게 창피했다. 어질러진 방도 감추고 싶었다. 사내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노인이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주쳐버렸으니 활짝 웃었다. 노인이 과하게 좋아한다. 술잔을 입에 터는 시늉을 한다. 내 방을 가리킨다. 술을 가져 올테니, 내 방에서 한잔하자 굽쇼? 며느리 눈치 안 보고 달리고 싶으신 거죠? 어르신 어림없는 소리십니다. 방 치워야 해요. 손짓 발짓으로 재롱도 떨어야 하죠. 못 해요. 못 마십니다. 매정하다 생각 마세요. 많이 까칠한 놈이에요. 잘못 보셨어요.
주방에서 찻물을 끓이다가 재빨리 쭈그려앉았다. 집주인이 현관에 서있다. 나를 못 보기를. 지나치기를. 왜 숨어? 도둑질이라도 했어? 의심 사기 딱 좋은데도, 몸을 숨겼다. 이틀 내내 없는 듯이 살아서,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고 싶다. 안 들켰다.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사흘을 자고, 조심조심 빠져나온다. 에어비엔비에 잘 지내다 간다는 메시지는 남겼다. 즉시 읽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땐 좋다.
전날 바다는 봤다. 이뻐 봤자지. 평소의 냉소적인 태도를 유치한 채로, 예쁜 석양을 봤다. 슈퍼마켓을 오가며 작은 식당 몇 개를 봤다. 그중 한 식당에서 남자 넷이 여러 개의 메뉴를 시켜서는 맥주를 마시고 있더라. 방콕인 줄 알았다. 커다란 빵 하나 들고 다니며 뜯는 조지아에서, 토마토에 소금 쳐서 반찬으로 먹는 조지아에서 이런 풍경을 보다니. 길바닥에 테이블을 내놓은 식당에서 여러 개의 메뉴를 동시에 먹는 풍경은 처음 봤다. 하얀 테이블 보를 올린 고급 식당 말고, 서민 식당의 플라스틱 테이블을 말하는 거다. 조지아가 맛있는 나라인 건 맞는데, 소문만큼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조지아 만두 킨칼리는 나를 믿고 안 먹어봐도 된다. 호기심 차원에서 한두 개 먹고 끝낼 것. 평균적인 식당의 평균적인 킨칼리 수준은, 우리나라 냉동 만두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된다. 우리나라 냉동만두가 조지아 최고의 킨칼리보다 맛있을 확률이 높다. 만두피는 두툼하고, 고기의 비율이 높고, 대단히 짜다. 문화의 상대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나를 욕하기 전에 일단 먹어 보라. 비비고 만두의 치열함은 없다. 치즈와 달걀을 올린 조지아식 계란빵 하차푸리는 짜다. 맛있지만 예측 가능한 맛이다. 반전은 없다. 지금까지 조지아 최고의 맛은 러시아 도시락 면이다. 세상에! 안에 마요네즈가 첨부되어 있다. 근본 없는 러시아 놈들은 멀쩡한 라면에 마요네즈를 쭉 짜서 먹나 봐. 처음엔 당첨 경품인 줄 알았다. 꽝이면 그냥 라면, 당첨되면 마요네즈 라면. 아니었다. 아예 마요네즈 라면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허연 기름 둥둥 뜨는 라면을 먹고 싶겠어? 내가 먹고 싶다. 내 입맛이 근본 없는 입맛이다. 조지아 놈들이 얼씨구 수입해서 나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국물을 먼저 다 마신 후, 면에다 비볐다. 차마 국물에는 못 짜 넣겠더라. 비빔 마요네즈 면은 팔도 비빔면보다 못하지만, 먹는 순간만큼은 러시아 국가를 제창하고 싶을 만큼 울컥하고, 차아이코프스키스럽게 발레발레 나발레했다. 바투미에서 터키까지 차로 30분. 그래서 터키 사람들이 많이 산다. 카지노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카지노에서 전 재산을 잃고, 죽기 전에 딱 한 번 찾는 터키 식당이 많을 것이다. 해산물이 비싸지 않고, 귀하지 않다. 체르노빌 방사능이 흑해로 흘러 들어온다는 소문은 안 들은 걸로 하겠다.
어디에나 인도가 있군. 걷기 편하다. + 10점(이게 왜 +10점? 따지고 싶다면 트빌리시를 먼저 한 시간 정도 걷다 올 것)
버스에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자리를 만들어 준 여인 +10점(허허 눈물 날 뻔했소)
전기 통닭, 전기 족발이 동글동글 돌아가는 케밥 식당 +30점(이건 못 먹고는 못 떠남, 못 죽음)
안 비싸 보이는 식당들도 메뉴가 다양하네 +20점
케이크 가게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전쟁 났어? +30점
100점
새로운 숙소를 찾으러 가는 30분. 바투미가 백 점이 됐다. 크리스마스이브도 아닌데 케이크 가게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이런 곳을 어떻게 그냥 지나쳐? 그럴 거면 미쳤다고 비행기를 타? 먹기 위해서 비행기를 탄다. 현지 사람들이 인정하는 식당에 잠입해서는 진미를 맛본다. 내 여행의 이유다. 바투미 대박 빵집 도나 베이커리(Dona bakeshop & cafe). 크림으로, 체리로, 앵두로 범벅이 된 케이크들이 농구선수처럼 늘씬하다. 가격은 2천 원을 안 넘는다. 에클레어(크림으로 속을 채운 길쭉한 페이스트리)는 600원 대. 우리나라에서 케이크 하나 값으로 커피와 두 개의 케이크, 혹은 세 개의 케이크가 가능하다. 내일 문 닫을 것처럼 퍼준다. 손님들은 굶주린 좀비처럼 달려든다. 모든 테이블을 꽉 채우고 30분 내로 1인 1케이크를 꿀꺽한다. 케이크 하나를 20등분으로 쪼개서는 두세 시간 먹는 사람은 없다. 냉면을 먹듯, 짜장면을 먹듯 케이크를 먹는다. 바투미 사람들에게 케이크가 푹푹 떠먹는 밥이다. 라면이다. 해변을 휘덮은 장엄한 구름과 그 사이를 뚫고 붉게 타오르는 노을 따위가 나댈 게 아니다. 초콜릿으로 범벅이 된 초콜릿 케이크는 초콜릿이 아니라 젤라틴이었다. 색만 초콜릿인 꿈틀이 케이크라니. 꿈틀이 좋아하는 아이들도 이 케이크 앞에서는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초코파이를 샀더니, 초콜릿 대신 꿈틀이로 휘덮였다고 상상해 보라. 도토리묵으로 코팅된 초콜릿 케이크라니. 이게 맛있다는 사람들은 철창에 가둬야 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만든 사람도, 먹는 사람도 다 죄인이다. 큰 죄인이다. 초콜릿 케이크만 비켜가면 나머지는 멀쩡하다. 버터와 땅콩이 들어간 케이크, 슈크림과 초콜릿 코팅으로 마무리한 에클레어는 훌륭하기까지 하다. 케이크 세 개에 차 한 잔을 먹고 4천 원을 썼다. 케이크 좀 맛있다고, 케이크 좀 싸다고 거 호들갑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그렇게 따지는 사람들이 나는 한심하다. 케이크 세 개에 차 한 잔. 4천 원. 그게 진심 무덤덤합니까? 돈이 남아 돌아서 하나를 먹어도 제대로 먹는 게 좋다고요? 그러시든가요. 세 개 중에 두 개나 제대로 된 케이크였다니까요. 내말 허투루 들으셨구만. 귓구멍에 케이크를 쭉 자 넣으셨나? 이곳에 매일 와서 모든 케이크에 별명을 만들어 줄 테요. 365일이 크리스마스인 케이크 집이니, 매일 와야지요. 이른 감이 있자만
메리 크리스마스!
PS 매일 여행기를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심각하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세상 끝까지 닿기 위한 즐거운 고행입니다. 지금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