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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l 19. 2019

돈이 없다. 먹어야겠다

욕망의 대충돌, 우주 지진급 

내가 너희들 때문에 각성하고 말았다. 훌륭한 식당 Radio 추천추천. 조지아 바투미

동전으로 4라리. 천육백 원. 현금은 이게 전부. 양배추 작은 거 하나랑 가지를 사서 갖고 있던 통조림 토마토와 끓인다. 짧은 국수 가락이 든 인스턴트 버섯 수프를 솔솔 뿌린다. 양배추, 가지 라면죽이 완성된다. 러시아 할머니께도 나눠 드린다. 남은 동전으로 땅콩강정을 사서는 정성껏 씹는다. 할머니께도 드린다. 현금을 탈탈 털어 썼다. 돈을 뽑아야 한다. 내 전 재산이 절반으로 쪼그라드는 날이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보자. 양배추, 가지 죽이 남았잖아. 저녁은 그걸로 때우면 된다. 때울 수 있겠어? 식후에 블루베리라든지 웨하스는 없다. 언제부터 후식을 챙겨 먹었다고? 코카서스에 오면서부터 후식을 챙겼다. 그깟 과자, 그깟 과일 참을 수 있다. 참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거잖아? 비참하다. 비침하면 식욕이 폭발한다. 돈은 일단 뽑고 보자. 돈이  있어야 식욕이 가라앉는다. 지금 침샘이 요동치는 건, 돈이 없어서댜. 비참하면 더 절박하고, 절박하면 속은 더 허해진다. 얼마를 뽑아야 하나? 한 달 후면 돌아간다. 한 달에 얼마면 버틸 수 있을까? 1박에 7천 원 방에서 잔다. 한 달이면 20만 원. 순수하게 먹는 걸로는 하루에 5천 원 정도를 쓸 수 있다. 외식만 안 하면 과일도 먹고, 과자도 먹고 흥청망청 버틸 수 있다. ATM 기계로 간다. 심호흡을 한다. 무섭다. 도망가고 싶다. 지금 나는 밧줄에 매달려 점프를  준비한다. 번지점프가 두려운 건, 죽을 때만 경험하는 생사의 경계를, 멀쩡한 몸으로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돈을 뽑는 건 번지 점프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씨티은행 카드가 지갑에 없다. 숙소에서 굳이  가져온다. 신한 카드로 뽑는 것보다는 현금 카드가 싸겠지. 돈이 안 뽑힌다. 젠장, 일부러 가지고 나왔더니... 신한 카드로 뽑는다. 드르륵, 실망스럽게도(?) 나온다. 일종의 대출이다. 빚이다. 빚은 무섭다. 얼마를 썼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수수료가 비싸봤자 만 원 차이일 텐데, 아깝고, 두렵다. 아냐, 아냐. 돈이 생겼다는 생각만 하자. 월급날 나갈 돈부터 생각하면 복 달아난다. 평생 거지처럼 산다. 양배추 가지 죽이 있지만 식당으로 간다. 죽이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호젓한 공간이 필요해서다. 식욕은 가라앉았고, 장소가 필요할 뿐이다. 먹겠다고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니까. 숙소에서 다들 내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났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글 쓰는 사람이다. 마침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가 있어서 들고 나왔다. 난리가 났다. 우리나라 책은 사진 많고, 그 어느 나라 책보다 예쁘다. 태국 요리와 식당이 빼곡한 책을 눈앞의 사내가 쓴 것이다. 관심 종자는 관심만 받으면 된다. 지속적인 관심은 사양한다. 진성 관심 종자의 기본 태도다.  


soup house


식당 이름이 수프 하우스다. 이름뿐이려니 했는데 수프만 거의 스무 가지. 버섯 수프와 당근 샐러드를 시켰다. 당근을 돈 주고 사 먹다니. 내 자제의 증거다. 먹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니까. 안 믿었지? 눈이 침침하니까 당근으로 속이나 채우자. 당근을 채 썰어서 간 호두와 버무린 샐러드가 나왔다. 채 썬 당근에 식초, 소금 훌훌 뿌린 게 나오겠지 했다. 아삭하고, 고소하다. 씹을 때마다 시공간이 멈추고, 삼킬 때가 되어서야 시공간이 움직인다. 짜디짠 버섯 수프는 또 어찌나  내 취향인지. 맨날 해먹겠다고? 당근 하나로도 이런 샐러드를 만들어내는 조지아에서? 아니, 그럼 어떻게 해? 못 누리는 것도 있어야지. 여행 다니는 것만으로도 축복인 줄 알아야지. 제철 과일을 원 없이 먹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그만 징징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여기 올게. 먹여줄게.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셀프 서러움으로 오열 좀 그만하라고. 


숙소 앞 과일가게에서 블루 베리를 산다. 눈 건강을 위해서다. 요즘 눈이 많이 침침하다. 1kg에 12라리. 헉! 비싸다. 5천 원이다. 관광지 물가인 건가? 아르메니아와 비교하면 두 배? 세 배 차이다. 충격적인 가격이다. 살까? 말까? 오늘만 먹자. 오늘이 수중에 돈이 가장 많은 날이니까. 아니, 아저씨, 1kg 못 사요. 조금만, 조금만요. 아니, 그렇게 많이 담지 마시고요. 어떻게든 많이 팔아먹겠다는 아저씨의 의지로 거의 4천 원 돈을 썼다. 만 오천 원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쓰면 열흘도 못 버틴다. 버티려고 여행해? 당근 샐러드에, 알이 통통 블루베리에. 즐겼으면 됐지. 왜 자꾸 돈돈하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오늘로 끝일까? 내일부턴 도시락 라면만 먹는 건가? 블루베리도 사흘에 한 번? 


다음날  아침, Radio란 식당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니 팬케이크와 연어 토스트를 눈앞에 두고 노트북을 폈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2주간의 구인광고


흥분해서 구인광고라고 해버렸다. 구직 광고잖아. 구직 광고. 8월 15일부터 2주간 한국에 머문다. 벌면 되지. 내 여행을 팔면 되지. 코카서스에 오고 싶은 사람, 여행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 지지부진 생초보 유튜버가 궁금한 사람을 만나면 되지. 내 가치는 내가 만드는 거야. 나를 만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판다. '판다'는 말이 거슬리지만,  지금 나는 영혼까지 팔 수 있다. 존재의  뿌리까지  도매금으로 넘길 의향이 있다. 매일 이런 아침을 먹고 싶다. 심장이 고루 비트박스로 흠칫 두둠칫. 놀라운 생동감이다. 영웅이나, 천재, 길이 남을 글쟁이보다 당장은 호사스러운 밥 한 끼다. 매일 최고의 한 끼를 먹고 싶다. 매번 번지 점프를 하듯, 두렵지만, 황홀하고 싶다. 수중의 돈 1000라리(40만 원)는 펑펑 쓰겠다. 돈은 쓰는 만큼 들어온다. 미심쩍지만,  이 말을 되새기겠다. 나의 모든 하루가 격렬히 진동한다. 곧 각성한 초인이 된다. 다부진 턱으로 열심히 씹는 초인이 된다. 


PS) 매일 글로 저만의 오체투지를 실천하고 있어요. 저를 만나고 싶나요? 한국에서 볼까요? 이전 글을 참조해 주세요.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의 영혼에 놀러와 주세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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