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미친듯이 뒤졌습니다. 왼쪽이 문제의 노란 재킷(사건 종료 후 사진 찍을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 리가 없다. 멀쩡한 지갑이 없어졌을 리 없지. 뒤적뒤적. 가방을 뒤집는다. 콧구멍이 활짝 열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서 가방을 쏟고, 다시 넣는다.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 수 없다. 방에다 두고 왔군. 커피를 주문하기 전에 알아서 망정이지. 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 캐리어를 쭉 잡아 당긴다. 짐을 다 꺼낸다. 있을 리가 없지. 주머니에 넣고 쓰는 지갑이 캐리어에 왜 있어? 있을 리가 없지만, 있어야 한다. 여기에 없다면, 없다. 지갑에는 어제 찾은 돈 천 라리가 있다. 50라리 정도 빠진 천 라리다. 40만 원 든 지갑이 안 보인다. 요즘 딱히 사고가 안 나네.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강도도 좀 만나고, 길을 잃고 길바닥에서도 좀 자고 그래야지. 나의 불행은 독자들의 행복이다. 남의 불행을 재밌어하는 거? 잘못 아니다. 악의 없는 거 안다. 행복한 연예인의 신혼보다는 멱살잡이 부부 싸움이 재미있는 법. 나만 불행하고, 부족한 게 아니구나. 안심하게 된다. 나는 요즘 막 산다. 어쩌려고 그러나 싶게 방심한다. 버스에다 여권과 지갑을 놔두고 휴게소에서 내린다. 콜라를 사 마신다. 숙소에서 캐리어는 활짝 열어 놓는다. 외장하드, 여권 지갑이 다 드러난다. 목걸이 형 여권지갑인데 줄까지 밖으로 삐죽 나와 있다.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사고가 나길 바랄 리야 없지만, 사고가 나도 잘 대처하겠지. 나의 짬밥을 믿는다. 그래? 얼마나 잘 대처하나 볼까? 나만 쓰는 공간이 아닌데도, 모든 짐을 바닥에 펼쳐 놓는다. 아무렇지도 않다. 정말 잃어버린 거야?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을 테지만, 절망도 일부 받아들인다. 현금만이 아니다. 신한 카드와 씨티 은행 카드도 있다. 평소에 분리해서 보관한다. 하나를 잃어버려도, 나머지 하나를 쓸 수 있게. 지갑에 둘 다 들어있는 날, 지갑이 사라졌다. 지갑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가방에 없고, 방에도 없다. 캐리어에도 없다. 어딘가에 흘렸을까? 지갑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식당인 것도 같고, 마트인 것도 같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내? 지갑을 여는 순간이 그렇게나 인상적일 리가 있어? 모르겠다. 어떻게 신고하지? 신한 카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씨티 은행은? 조지아에 정 좀 붙이나 싶었는데, 이렇게 끝?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고? 출국 날짜를 바꾸려면 수수료를 내야 한다. 카드로 내면 되지. 인터넷으로 카드 결제를 하고, 카드 정지 신청을 한다. 그 사이 설마 누군가가 카드를 쓰지는 않겠지? 금요일이다. 시차는 다섯 시간. 한국 업무 시간이 끝나기 전에 정지 신청을 해야 한다. 신청을 하고 지갑이 나오면 어쩌지? 카드를 아예 못 쓰게 된다. 카드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어?
집에 가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절망도 귀찮다. 한국 집 말고, 방콕에 가고 싶다. 쌀국수를 먹고, 망고를 먹고 싶다. 준비가 가능한 절망은 없다. 그걸 깨우치기 위해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작 지갑 하나다. 작은 물체 주머니 하나로 여행 숨통이 끊겼다.
잠깐
유니클로 노란 재킷이 어디 있더라?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에어컨 바람이 세다 싶을 때 걸치는 비닐 재킷이다. 없다. 왜 없지? 희망이 생긴다. 재킷엔 큰 주머니가 있다. 거기에 지갑이 있을 수도 있다. 지갑을 넣은 기억은 없다. 그따위 사소한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일단 재킷, 재킷을 찾아야 한다. 카페에다 놓고 왔나? 지갑 찾는데 정신이 팔려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숙소 마당에 앉아 있었지. 라면도 끓여 먹었지. 그때 의자에다 걸쳐놨었나? 마당으로 나간다. 있다. 노란색 싸구려 재킷이 의자에 매달려 있다. 주머니, 주머니는? 뭔가가 잡혀야 한다. 잡힌다. 조지아 지폐로 볼록한 지갑이 잡힌다. 찾았다. 죽다 살아났다. 여행이 죽고, 내 모든 희망이 잠시 사망했다. 결국 찾을 거 왜 이리 호들갑일까? 나의 가벼움이 불안하다. 언젠가 죽을 거고, 언젠가 더 큰 사고도 닥칠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치고, 게거품을 물다가 최후를 맞이하겠군. 품위 있는 최후는 꿈도 못 꾸겠어.
잠깐
지금, 나는 절망의 심해에서 건져졌다. 밝은 빛과 넘치는 산소에 춤을 춰도 모자랄 판이다. 혼내는 거에 익숙한 거 안다. 나를 여물게 하려면, 반성이 먼저인 것도 안다. 춤추는 법을 잊어선 안 된다. 지금 할 일은 도나 베이커리에 가서 가장 비싼 케이크를 먹는 일이다. 두 개를 먹어도 되고, 세 개를 먹어도 된다. 죽다 살았으니 생일이고, 없어진 돈이 생겼으니 복권 당첨된 날이다. 이 여행이 이리도 간절했구나. 그 마음을 보았던 날이다. 진짜 춤이라도 춰야 하나? 와인 한 병 병나발 불고 클럽에라도 가야 하나? 신생아실에서 갓 나온 아기 박민우에게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지구 끝까지 닿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우주이고, 스승입니다. 2019년은 '입 짧은 여행 작가의 방콕 한 끼'로 오체투지 중입니다. 매일 한 권의 책이 더 팔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