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목포 해양 대학 김 교수가 20만 원을 보내왔다. 응? 큰돈인데. 씨티은행 통장이 95만 원까지 치솟고, 다시 60만 원대로 쪼그라들었다가, 80만 원대가 됐다. 인출한 태국 돈 만 밧(약 36만 원)은 거의 그대로 호주머니에 있다. 기쁘냐고? 나는 이 기쁨을 티 내선 안 된다. 아니, 평소와 다르게. 진지하겠다. 통장 이야기를 자주 한다. 통장 잔고 259만 원. 결국 질러 버렸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행 작가들은 이제 통장 잔고 이야기를 의무로 생각한다. 내가, 박민우가 모든 궁상의 시조새다. 솔직함의 힘을 믿어서다. 까발릴 수 있는 걸 모두 까발리고, 비슷한 처지의 아픔들과 가까워지고 싶다. 멀리 있으면 안 돼! 온기를 느끼며, 곁을 채우고 싶다.
나의 글을 안 읽었으면 하는 대상이 있는데 가족과 학교 친구들이다. 무슨 도움이라도 줘야 하나? 부담부터 느낄 것이다. 박민우가 정말 이렇게 살아? 저절로 찌푸려질 것이다. 용감해서 솔직한 게 아니다. 소심해서 솔직하다. 나중에 들키는 위선이 두렵다. 내 안의 깊은 찌질, 깊은 이기심, 바닥난 통장을 까발릴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삶이 게임이란 걸 확신한다. 몰래카메라다. 이 모든 장난이 '장난'임을 아는 자가 최후의 승자다. 몰입은 하되, 결정적 순간에 안 속았지롱. 한 발 빼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정교하게 게임에 임하는 중이다. 몰입하지 않은 게임은 싱겁다. 재미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매일 밤 고스톱을 치신다. 아버지는 늘 화투패 한 장을 방석 밑에 숨기고, 어머니는 속수무책 당하신다. 가끔 알아채고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신다. 돈 내놔, 못 가. 아버지는 어머니를 질질 끌고, 거실 여기저기로 도망치신다. 지켜낸 천 원 더미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신다. 어머니의 얼굴은 발갛고, 아버지 표정은 초조하다. 어차피 그 돈이 그 돈이지만, 둘에게 양보는 없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발버둥을 쳐야 한다. 성적표를 받는 날, 죽는 날. 속 시원한 휴식이다. 대충 놀았던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이다.
게임에 몰입하기 위해, 긴장감을 잃고 싶지 않다. 나의 줄타기를, 흥미롭게 봐주는 것. 그게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내게 20만 원을 보내준 건, 지은 죄가 있어서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같이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모처럼 큰 마음먹고 수업에 들어갔었다. 볼펜을 찾는데, 가방에서 뭔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볼펜이 나를 꼴아볼 이유는 없다. 이유를 알고 싶어, 나도 꼴아봤다. 꽁치 대가리다. 꽁치 대가리가 나를 노려본다. 시드니 샐던의 천사의 분노라는 소설이 있다. 증인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은 카나리아가 전달된다. 봉투 속 죽은 카나리아에 증인은 사색이 된다. 증언을 거부한다. 죽은 카나리아 꼴 나기 싫으니, 입을 닫겠습니다. 그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한다. 나는 늘 중요한 사람이고, 외계인이거나, 지구를 구할 영웅일 것이다. 내 목숨을 탐하는 이들이 한둘이겠어? 그래도 이유는 알려주고, 협박을 해야지. 내가 지켜야 할 비밀이 도대체 뭐냐고? 꽁치 대가리는 목포 하양 대학의 인기 교수 김 교수의 선물이었다. 생각날 때 먹으라고 휴지에 돌돌 말아서, 아식스 까만 가방 앞 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이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 배려에 종일 눈알을 굴리며, 혹시 모를 암살자를 대비해야 했다.
김 교수는 그런 새끼, 그런 분이시다. 김 교수님의 위대한 업적은 과실 어록에 착실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감자탕 사건이다. 고대 정문 말고 쪽문으로 나가 길을 건너면 시장통이 나온다. 감자탕 집에서 술을 퍼마셨다. 어, 누가 이걸 버렸어? 1학년 풋풋 김 교수는 재떨이에 버려진 남의 돼지뼈를 쪽쪽 빨았다. 살점이 그대로라며, 열심히 빨아댔다. 그럼 닥치고 잘 삼킬 것이지. 쪽쪽 빨다가 내 눈앞에서 오바이트를 했다. 아오, 삼수를 해서 연대를 가야 하나? 닭발 집에도 캘빈 클라인 항수 냄새가 날게 뻔한 신촌이 그리웠다. 내가 자퇴하면 이 새끼 덕이다. 더럽고, 술자리에 끝까지 남으면 영웅이 되는 시절이었다. 나만 빼고, 다들 김 교수를 섬겼다. 내가, 박민우가 국문과의 아이돌이어야 해. 나는 이놈 절대 질투 안 했다.
"대가리가 아니라, 멀쩡한 한 마리거든. 휴지가 아니고 a4 용지로 말았어. 제대로 기억하는 게 하나 없네."
사실 확인차, 페북으로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런 답이 왔다. 좀 놀라웠다. 취해서 객기로 한 행동이 아니라, 심신 전혀 안 미약할 때, 그냥 쑤셔 넣은 것이다. 진심으로 이 꽁치를 속이 허할 때, 뼈채로 씹어먹으라는 배려였다.
꽁치가 20만 원이 됐다. 꼴통은 어허 어엿한 성자가 됐다. 그래서? 그때 꽁치는 버렸으니까, 이 돈은 안 버리겠다. 진심이 이제야 닿았네. 꽁치일 때부터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 너무 버릇없이 굴었을까 봐, 마음이 안 편해. 진심 두 번 두드리니, 훅 들어왔어. 꽁치에서 20만 원, 그다음은 목포 시내 원룸인가? 제목을 꼴통 김 교수라고 했네. 성자 김 교수로 교정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