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십계명: 우리는 조금은 흠 있는 가족임을 받아들일 것
-여기서 밥 먹고 가요.
-배 안 고프다.
-여기 죽 한 그릇에 800원(20밧)이네요.
-그럼, 가져와 보든가.
어머니, 아버지는 밖으로 나오시면 무조건 배가 안 고프고, 목이 안 마른 사람이 된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아버지 표정이 특히 안 좋아지신다. 믹스 커피가 천하제일인데, 어쩌자고 비싼 돈 쳐들여서, 더 맛없는 걸 마신단 말이냐? 밖에선 물, 안에서는 커피 믹스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윤라이 전망대에서 파는 죽이 800원이어서 망정이지, 이삼천 원만했어도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로 배가 고프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자로 바글바글한데, 죽 한 그릇에 800원이다. 양은 안 많지만, 맛조차 있다. 관광지에서 어찌 이런 가격에 팔 생각을 했을까? 나나 되니까, 이런 가격이 특별히 감사하다.
사람이 많으니 동그란 테이블에 두, 세 팀이 앉는다. 전망이 제일 좋은 자리를 운 좋게 차지했다. 아버지가 옆 사람들이 남기고 간 찻주전자를 번쩍 든다. 입으로 가져가신다.
-아버지, 뭐 하세요. 남의 걸 왜 마셔요. 그리고 찻잔에 마셔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는, 남은 차를 입을 벌리고, 식도로 쪼르르 흘려보낸다. 나는 아아, 아버지. 아아, 제발요. 이러면서 테이블에 엎드린다. 아버지는 주전자를 내려놓으신다. 무릎이 안 좋은 일흔둘의 아내와 구름과 안개가 일렁이는 풍경을 봤다. 신선놀음이로다. 엄격한 나름의 기준을 통과한 800원 죽도 든든하게 먹었다. 늘 마음에 드는 자식은 아니지만, 오늘은 합격. 오손도손 한 끼로 배를 채우고, 입만 살짝 헹구고 싶다. 눈 앞에 찻주전자가 있다. 입만 헹굴 것이다. 거기에 또 돈을 쓰라고? 입만 헹굴 거라고오오오! 내 속도 모르는 아들놈은, 사람 다 보는데서 언성을 높여? 아비가 주전자를 든 이상, 다시 내려 놓을 순 없지. 졸졸졸. 봐라, 아들아. 나오는 물을, 나오게 했다. 이런 걸 순리라고 한다. 10초 안에 모든 상황은 종료됐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는 멀찌감치 떨어지신다. 다른 걸 보는 척 하지만, 내 언성이 괘씸했다. 또 싸울 순 없지. 이성의 힘으로 멀어지신 걸 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반응을 분석한다. 남들 눈도 신경 좀 쓰셔야죠.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이, 한국 사람이 욕먹는 게 싫다고요. 아들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 주시나요? 내가 더 옳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탁기가 없는 숙소가 어디 있니?
-TV가 없는 방은 처음 봤다.
-아니, 이딴 이불을 주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지금 묵고 있는 방은 더블룸이다. 두 명이 묵는 방이다. 세 명 묵게 해 달라고, 내가 빌었다. 숙소 주인은 매트리스와 이불을 챙겨줬다. 사실은 커버를 씌워서 덮으면 된다. 귀찮아서 그냥 덮고 잤다. 어머니는 분리된 커버가 못 마땅하시다. 나보다 더 여행을 많이 하셨는지, 세탁기도 없고, TV도 없는 방이 어이없다. 이런 방은 처음이야. 이런 말씀이 반복될 때마다 묘하게 어머니를 괴롭히고 싶다. 엄마가 저보다 여행 더 많이 하셨어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사실 그렇게 몇 번 반박했다.
-원래, 두 명 자는 방인데, 한 명을 공짜로 더 재워 달라고 제가 사정한 거예요. 우리가 불평하면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엄마가 말을 하면 좀 듣고만 있으면 안 돼? 사사건건 그렇게 토를 달아야겠니?
73년생 박민우는 다섯 살 때부터 말로는 안 졌다. 사사건건 부모에게, 어른에게 토를 달았고, 그렇게 매를 벌었다. 어른에게, 형에게 그렇게 처맞으면서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쓰는 이 글은 무엇보다 내게 가장 중요하다. 글로 내가 정리되고, 부모님이 정리된다. 또 언제 터질까? 두렵다.
누가 더 옳은가로 핏대를 세우지 말 것.
황홀한 순간을 매일 하나씩은 준비할 것.
아슬아슬한 장애물을 모두 넘고 싶다.
완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을까?
PS 매일 글을 씁니다. 이 글은 1월 치앙마이 여행이었어요. 지난 얘기죠. 유료로 구독자에게만 보냈던 글입니다. 부모님과의 여행, 현실적인 고민과 공감이 가능한 글이라서요. 몇 개를 골라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