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아픈 우리의 하루 - 타이베이
아니, 아니. 여기 모인 사람이 전부 한국 사람이라고요? 저 커다란 관광버스 네 대에 한국 사람만 탄다고요? 시먼딩 역에 무슨 길거리 공연 있는 거 아니고요? 시먼딩 역은 타이베이의 명동이에요. 과장 없이 정말 한국 사람 반, 대만 사람 반이더군요. 그래요. 사람 다 비슷하죠. 저도 혹했으니까요. 1인당 2만 원에요. 버스로 예스진지 투어를 해요. 오전에 가서 밤에 돌아와요. 예스진지는 예류 지질공원, 스펀, 진과스, 지우펀의 약자예요. 예류 지질공원은. 버섯처럼, 초코송이처럼 봉긋봉긋 기암괴석으로 유명하죠. 스펀이란 곳에서는 천등을 날려요. 진과스는 한때 금이 펑펑 나오던 노다지였고요. 지우펀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요. 정말 유명한 만화영화의 배경이었던 곳이죠. 이 네 곳을 돌아보는데 2만 원만 내요. 물론 밥이나 입장료, 천등 값은 각자 내는 거지만요. 그것도 한국 가이드와 함께예요. 세상 너무 좋아졌죠? 그래요. 사람 당연히 많아야죠. 그래서 싼 거죠. 그걸 예측 못 했냐고요? 했어요. 버스 한 대에 꽉 차는 정도인 줄 알았어요. 버스 네 대라니요? 입이 안 다물어져요.
한국 사람은 여행에 미쳤어요.
평생 노예처럼 살 줄 알았어요. 돈돈하면서, 반성 없이 질주할 줄 알았죠. 자본주의 세상에서 특출 난 우등생이니까요. 전쟁고아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던 나라가요. 이젠 웬만한 나라는 다 우스워요. 다 지저분해 보여요. 참 악착같이 벌었죠. 앞만 보고 달렸어요. 언제부터 큰 깨달음이 동시에 찾아왔어요. 놀아야 한다. 더 놀아야 한다. 친구가, 가족이 암으로, 과로로 쓰러졌죠. 졸음운전으로 죽고, 공황장애로 지하철을 못 탔죠. 하라는 대로 하고, 벌어야 하니까 벌었는데, 부작용은 잔인했어요. 그래서 놀아요. 여행 다니죠. 어머니, 이모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 더 놀러 다니셔야 해요. 보셨죠? 저 많은 사람들요. 저 사람들이 다 한국 사람이에요. 지지 말아요. 이 재미난 세상, 다 누리고 떠나세요. 꼭 그러셔야 해요.
예류 공원은 저에겐 그저 그랬어요. 맑고 투명한 바다도 아니고요. 전쟁 난 것처럼 바글바글하니까요. 흥이 안 나더라고요. 신기한 줄도 모르겠어요. 어머님, 이모님도 놀랍지는 않으시죠? 더 좋은 곳도 가 보셨죠? 좋으세요? 그래도 마냥 좋으세요? 가치는, 가치를 매기는 이의 전유물이죠. 행복하겠다고 작정한 사람, 못 이겨요. 빛나기로 한 사람은, 빛나요. 간단하죠. 세상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요? 그럼 복잡하게 계산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가까스로 행복해져야 할까요?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까요? 배웠다 싶은 사람들,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늘 심각하죠. 시비를 잘 걸죠. 가벼워지는 법을 몰라요. 어머님, 이모님 덕에 저도 가벼워졌어요. 지혜는 논리에 없어요. 지식에 없어요. 지혜는 직선에 있어요. 좋다, 좋다, 좋으니까 좋다에 있어요. 왜? 에는 없죠.
사고는 스펀에서 일어났어요. 천등이라고 해요. 종이로 만든 입체 연이죠. 거기에 소원을 써서는 날려요. 안에 심지가 있어요. 불을 붙이면 훨훨 날아요. 활활 타면서요. 돈 드는 건 무조건 안 하겠다는 이모님, 어머님! 보세요. 천등 날리기를 잘했죠? 그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천등 날렸으니 닭 날개 볶음밥도 먹어야죠. 시간이 아슬아슬해요. 그래도 먹어야죠. 닭 날개 안에 뼈를 발라내고 볶음밥을 넣었어요. 기발하죠? 기발하기만 한 게 아니라, 맵콤 짭짤한 게 맛도 좋네요. 닭날개 덮밥을 들고, 우린 서둘러요. 버스가 있는 곳으로요. 어?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몰리면서, 안 보여요. 버스를 세워둔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길을 묻는데, 다들 못 알아들어요. 버스를 못 찾다니. 새삼 제가 참 멍청해요. 사람이 조금 늘었다고, 전혀 다른 길로 보이네요. 식은땀이 납니다. 어머님, 이모님은 계속 물어보라는 말씀만 하세요. 물을 만큼 물었고요. 다들 모른다잖아요. 찾아낼 거예요. 제발 보채지 좀 마세요. 머리통이 터지려고 한다고요. 두 분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이 힘겨워요.
결국 찾아내요. 10분 늦었어요. 처음 예류 공원에서도 한 가족이 늦었죠. 가이드가 대놓고 투덜댔어요. 우리에겐 더 매몰차게 굴더군요. 세 분 때문에 이게 뭐예요. 기다리시는 분들은 뭐가 돼요? 이분들이라고 더 있고 싶지 않았겠어요? 가이드 말이 맞죠. 백 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그 말만 반복해요. 이 글 읽고 가이드 참 정 없다. 욕하지 마세요. 수많은 버스가 오고요. 그 버스들이 줄을 서서 자기 손님들을 태워요. 한 번 놓치면 다시 유턴을 해서 맨 뒷 버스의 뒤로 가는 거예요. 그런 상황 안 만들려고, 가이드는 제시간에 와 달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어요. 우리가 죄인 맞아요.
죄인이 된 우리는요. 지우펀에서는요. 아예 여행을 포기해요. 지우펀은 산속 인사동이라고나 할까요? 금이 펑펑 나던 시절에 흥했던 산기슭의 번화가죠. 꼬불꼬불 골목마다 식당이고, 기념품 가게예요. 그 좁아터진 골목으로 어마어마한 관광객이 밀어닥칩니다. 재난 영화예요. 재난이에요. 큰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으로, 좁은 골목은 아비규환입니다. 그래서 중간쯤에서 돌아서요. 버스 주위만 맴돌죠. 또 늦으면 안 돼요. 우린 정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미안해. 다 늙은 우리 데리고 다니느라, 네가 욕본다.”
어머님은, 이모님은 제 눈치를 보십니다. 제가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안절부절못하죠. 저만 믿습니다. 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세요. 저는 절대적인 존재죠. 하지만 당신들의 행복이 아들의 희생 이어선 안 되죠. 평생 희생했는데도 세상 어머니는 늘 미안하대요. 늙어서 미안하고, 느려서 미안하고, 무릎이 안 좋아서 미안하대요. 그래도 눈치 없이 여행이 좋아서 미안하대요. 어머니, 이모님. 제가 잘못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야죠. 눈치 보고, 짜증 낸 제가 어리석었어요. 제가 당당했어야죠. 제가 가이드에게 알아듣게 잘 말했어야죠. 저는 괜찮아요. 제 걱정은 마세요. 지금 이 행복은 마지막 순간 챙겨갈 제 행복이에요. 저를 위한 여행이에요. 모르셨죠? 두 발 뻗고 주무세요. 피곤하고, 정신 사나운 하루였어요. 그래도,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하루였으니까요. 우리의 잠은 달고, 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