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랏에서 하품하는 여행자가 되다
(2020년 1월,2월 베트남 달랏에서 머물 때 이야기입니다. 코로나 세상이 어서 빨리 끝나고, 여행의 즐거움을 모두가 누리는 세상이 왔으면 해요)
Luxe 호텔 라운지에 앉아서, 남의 호텔이나 검색하는 것만 봐도 65억은 이미 글렀다. 아니 아고다에선 4만 원인데, 왜 8만 원이야? 설날이라 빈방이 없으시다? 하나 남은 방이 하필 8만 원? 65억이 있다손 쳐. 부자가 돈 펑펑 쓸 것 같지? 이유가 있어야 주머니를 뒤적이는 게 부자들이야. 두 개의 편의점 스타벅스 라테(서울우유에서 만드는) 가격이 다르다면서 따지는 게 부자들이야(내 친구 뒷담화 아님). 내가 생각한 가격보다 훨씬 비싸졌으니까, 난 이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어진 거라고(누가, 뭐래? 등신아).
천하의 거지 작가 하나 홀려 보겠다고, 교포 할머니 한 명을 폐암 환자로 만들어? 사진도 어디서 무단 도용했겠지. 브런치(brunch.co.kr)에 가입해서, 고르고 고른 게 나야? 번역기를 돌리면서 지네들끼리 낄낄댔겠지. 사기 치는 글이지만 소름 돋았어. 내가 봐도 눈물 찔끔 나오는 거 있지. 감히 문장으로, 하필이면 박민우를? 믿기로 했으면, 그냥 믿어, 좀! 잃을 게 없는데 왜 이리 까칠해? 잘 될 것도, 이러니까 안 되는 거야. 거지새끼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해? 뭐가 그리 대단해? 그런 자신감으로 돈 좀 팡팡 벌어보든가.
하루 2만 5천 원 방을 재빨리 찾아내고는, 오토바이를 기다린다. 오토바이 택시가 온다. 캐리어를 가슴팍에 안고는, 아슬아슬 엉덩이를 걸친다. 오토바이 택시가 나에겐 너무나 쉽다. 누구에게나 쉬운 시대가 됐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목적지를 누르고, 오토바이를 부른다. 동남아시아에선 GRAB을 깔면 된다.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애플리케이션이 여전히 낯선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거 안다. 외국이라면 더더욱.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스마트폰을 아무도 낯설어하지 않듯이, 남의 나라에서 택시 잡기, 오토바이 잡기도 우스워질 것이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닳았을 때, 그때만 길을 잃을 수 있다. 샤오미 보조 배터리 하나면 이 문제도 해결된다. 갤럭시 노트 9는 하루 종일 간다. 낯선 여행지 특유의 긴장감이 사라졌다. 승부를 이미 아는 경기를 보는 따분함이다. 집에서도, 떠나서도 맥박이 규칙적으로 뛴다. 만만한 여행이라니. 슬픈 안정감이다.
어리숙하고, 이기적이고, 의심 많은 자의 발광, 오두방정. 그게 내 여행이었다. 처음 온 도시에서, 능숙하게 오토바이 택시에 짐을 척 올린다. 똥꼬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는다. 능숙해진 박민우에겐 이제 빼먹을 게 없다. 진부한 여행자가 됐다. 딱 좋은 때에 65억이 굴러들어 온다. 이제 여행기는 그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서야 할 때다. 태국 수코타이에 땅을 잔뜩 사들여서, 웃음 치료 힐링 센터를 지어야겠다.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두려운 사람은 다 이리로 오시오. 같이 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읍시다. 죽는 게 아무것도 아닌 놀이터를 만들어 봅시다. 그래! 그 돈은 내가 받아야겠다. 섭씨 26도. 냉기를 품은 바람. 잠깐 흐려지는 것 같더니, 구름 커튼이 일시에 걷힌다. 노름한 태양이 거리를 메운다. 설날이라 닫았던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쌀국수 가게, 꽃가게, 샌드위치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정렬된 오토바이들. 어엿한 흰색 주택가가 유럽 같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베트남은 이렇게 화사해서는 안돼. 2만 5천 원 방은 어떤 방일까? 조용하기만 하면 된다. 악취만 안 나면 된다. 창이 좀 컸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침대 시트에서 세제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어제 벗은 팬티랑 양말을 빨 건데, 볕이 잘 드는 베란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을 끓일 건데, 티백 몇 개는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은의 언젠가는,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이어서 부를 건데, 방음이 조금은 잘됐으면 좋겠다. 65억 할머니는 이제 메일을 그만 보냈으면 한다. 아무리 상상해도 신이 나질 않는다. 그깟 65억으로, 감히 나를 들었다, 놨다 해? 좋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멋대로 까불고 싶다. 날고 싶고, 용수철처럼 튕겨지고 싶다. 나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면서 다음 작전을 세우는 사기꾼들이 소름 끼친다. 웃고 떠드는 장난도 여기까지. 그래도 이메일을 막을 용기까진 없다. 만에 하나 마지막 한 달을 남긴 사람의 작은 숨통일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여행자이고 싶다. 하루 열두 번 변심하는 나를, 쥐고 흔드는 악당을 정말이지 혼내주고 싶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면 친구가 됩니다. 때로는 먼 곳의 이야기를, 때로는 가까운 곳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직접 볼 일 없는 친구가 때로는 더 좋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