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트라 숲 20인분의 식사는 언제나 정갈하다.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린다. 식사를 마치면 나만 도시락을 싼다. 근처에 편의점도 식당도 없다. 김은 포기. 어떻게 싸갈 방법이 없다. 수줍게 나머지 반찬만 싸는데, 알콩달콩 신혼인 김 PD가 봉지 하나를 찾아서 김을 빽빽하게 넣어준다. 김치찌개를 담아가셔야 하는데요. 방에는 조리도구가 없다. 빡빡한 김 봉지와 담아가지 못한 김치찌개는 세자트라 숲의 기억이 된다.
47명이 신청했어요.
마사만 카레의 밤. 태국 카레 마사만 카레와 함께 하는 밤. 내가 요리하고, 내가 떠드는 시간. 이례적인 숫자라고 한다. 계속 문의전화가 온다. 막상 오면 더 맛있고, 더 재미날 걸 어찌들 아시고. 47인분 요리를 해본 적은 없다. 잘하고 싶다. 두려움보다 즐거운 의욕이다. 좋은 징조다.
카레 재료를 사러 통영 하나로 마트로 간다. 서 PD의 스파크 차로 간다. 조심하세요. 살아 돌아오세요. 사무실 사람들이 경고한다. 농담이겠지. 차 안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서 PD가 전화기를 찾는다. 일단 세운다. 전화를 받는다. 침착하고, 바람직한 태도다. 운전을 잘 배웠군. 스크래치와 찌그러짐으로 가득한 스파크는 초보운전자를 성장시켰다. 그때쯤 지는 벚꽃이 눈처럼 시야를 채운다. 2019년 4월의 통영은 겨울보다 더 하얗다.
통영 하나로 마트 2층은 바다가 보인다. 2층 창문으로 일렁일렁. 꿈 풍경이다. 도대체 몇 마리의 닭을 사야 하나? 일곱 마리로 결정. 여덟 마리는 좀 넘치지 싶다. 서 PD와 나 모두 여덟 마리 직전에 멈췄다. 서 PD는 빵을 사야 하냐고 여러 번 묻는다. 태국 요리니까, 굳이 빵? 서 PD는 빵을 좋아하는군. 나는 눈치가 빠르다. 빵을 찍어먹어도 맛있겠어요. 재빨리 빵과 마사만 카레의 궁합을 떠올린다. 깊고, 되직한 붉은 국물에 촉촉 젖은 식빵. 먹어본 사람들은 모두 자지러질 것이다. 통영 사람들 어쩌면 좋지? 평생 다시는 못 먹어볼 맛일 텐데. 태국에도 이 맛은 없다. 그러니까 박민우가 만든 맛이, 태국 웬만한 맛집보다 좋다는 얘기. 평생 딱 한 번의 맛을 당연한 맛으로 알면 안 되는데. 참고로 여행작가 문상건은 내 마사만 카레 맛에 반해 태국 곳곳을 찾아다녔지만 실패.
스탠포드 호텔은 통영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다. 잠시 들른다. 장학사님께 신용카드를 전해야 한다. 같이 식사를 하고, 카드 단말기가 불통. 일찍 자리를 떠야 하는 장학사님이 카드만 두고 갔다. 스탠포드 호텔 앞은 서 PD가 원래 살던 곳이기도 하다. 호텔 앞 기차가 옛날 서 PD네 식당. 기차가 좀 슬프게 텅 비었다. 서 PD도 오랜만인 곳. 생각보다 쓸쓸해 보여서 서 PD가 놀란다. 주차할 곳이 없어 후진을 하다가, 팰리세이드에 쿵. 후진을 하는데 완벽하게 왼쪽만 보더라. 나는 오른쪽도 봤다. 팰리세이드로 성큼 다가가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 조그만 차가, 수많은 공간을 놔두고 팰리세이드에게 빨려 드는데,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 한다. 팰리세이드가 왜 거기 있는 건가요? 이유는 없고, 좀 자기중심적인 서 PD의 세계관이 거기 있었다.
차 주인에게 전화를 세 번 걸고, 문자 메시지까지 남긴다. 서 PD는 슬픈 얼굴로 장학사님께 카드를 전하고,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그게 얼마나 새 차인지, 차 주인에겐 얼마나 빡도는 일인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다. 더 슬퍼진 얼굴로 '몸과 마음'이란 카페로 갔다. 그전에 내게 추천해 준 카페다. 추천을 믿고 갔는데, 문이 닫혔었다. 서 PD는 이곳을 꼭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어수선하기 직전까지 잡동사니로 꽉 채운 카페는 창밖으로 벚꽃까지 가득하다. 서 PD는 중학생 때 내 책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를 읽었다. 중학생 서 PD의 인생 책이 되었다. 덕분에 세자트라 숲에 초대되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열심히 돈을 모았다. 쓰는 게 아까워서 시드니도 못 가봤다. 로마의 휴일이 인생 영화인 어머니와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학자금 대출이 이천만 원이나 남았지만,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팰리세이드 차 주인은 이런 서 PD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그깟 백미러는 셀프 교체했으면 한다. 차주인에겐 연락이 없다. 나까지 조마조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참 어려워요.
서 PD의 고민이다. 나는 창의력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다. 팔자주름이라든지, 원형탈모, 굽은 등이 내 고민이다. 누구의 고민이든 무겁다. 무게를 키운 건 자기 자신.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하다. 그것만 이해하면, 나도 서 PD도 좀 더 행복해질 것이다. 늘 창의적인 사람은 없다. 매일 한 줄의 엉뚱한 글이, 놀라운 곳으로 자기를 데려다주지 않을까? 매일 한 줄만 기록해 보라고 했다. 뜬금없는 조언인데, 괜찮은 조언 같다.
용인 고기리 별 다섯 카페에서 엄청난 선물이 왔다. 커피 원두와 그라인더, 필터, 드리퍼. 홈카페 풀세트가 택배로 왔다. 내 혀로 느껴지는 커피 맛이 궁금하다며 별 다섯 카페 사장님이 보낸 선물이다. 그라인더로 갈리는 커피 향이 거대한 구렁이처럼, 혹은 용암처럼 사무실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간다. 향 하나로 사람을 마비시킨다. 화끈하게 로스팅한 커피도 아니다. 은은하게, 구수하게 끈질기다. 아직 맛을 보지 못했다.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느라. 절대반지 향을 내는 커피가 어떤 맛을 낼지, 미치도록 궁금하다.
전날 도시락. 환상의 제육볶음
도시락 뚜껑을 열 때가 하루 중 제일 좋다. 누그러진 밥알의 향이 좋고, 오징어 채, 오이 무침, 마른 김이 좋다.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라 사실 아찔하게 좋다. 혼자여서 두려웠던 세자트라 숲이, 따듯한 식탁이 된다. 바깥세상의 활력은 사실 소음이었다. 싸구려 노트북에서 들리는 음악은,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다. 12시가 되면 블랙핑크 신곡이 나온다. 식상하다 싶은 노래가, 이상하게 안 질리겠지. 기다리다 듣고 자면 좋은데, 열 시가 되니 눈이 감긴다. 밤 열 시에 눈이 감기는 삶. 이것만으로도 나의 4월은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