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잠을 청하려다가 불을 켰다. 덜컹, 아주 미약하게, 덜컹. 깜짝이야. 통영 세자트라 숲은 통영시 용남면. 다이소 건너편 옻칠 박물관 골목. 택시로 십 초만 더 가면 희끗희끗 바다와 드문드문 배들이다. 집들이 전경을 가로막는데, 그것대로 웅장하다. 구불구불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 세자트라 숲이다. 야트막한 오르막 걸음으로 10분. 내가 머무는 숙소가 있다. 매트리스는 튼튼하고, 방은 환하다. 여행 중에 이런 숙소는 가끔만 머물 수 있다. 까끌까끌 베개에 코를 묻고, 세재 냄새를 맡는다. 새벽 두 시의 이 방이 무섭다. 총 여덟 개의 방, 묵는 사람은 나 하나. 덜컹 소리는 아마도 고라니, 혹은 멧돼지. 아니, 어쩌면 귀신. 아니, 왜 그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세자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작은 송별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총 열 명의 점쟁이에게 죽은 커플의 사주를 건넨다. 딱 두 명의 점쟁이만 맞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내가 했다. 내 주둥이를 꿰매야 한다. 2주다. 2주를 다 쓰고, 나는 떠난다. 2019년 봄을 두 눈 부릅뜨고 보려고 왔다. 남해의 바람, 만개한 벚꽃 보러 왔다. 바랐던 풍경보다 더 흐드러진 꽃눈이 쏟아졌다. 인물값 한다고, 벚꽃은 일주일을 못 버틴다. 벚꽃만 보자면, 끝장났다. 말라비틀어진 채로, 일 년을 산다. 피고 지는 평생을 2주 동안에 봤다.
낮에는 서피랑을 다녀왔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너무 관광지. 벽화는 이젠 뒷걸음질 쳐진다. 동피랑의 잘못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도 벽화가 있다. 일일이 감탄하다, 시들해졌다. 서피랑은 무벽화 유기농 골목이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오늘 내 눈엔 안 띄었다. 서피랑은 허름한 채로, 받아들인다. 서피랑 공원에서 항구가 보이고, 남망산 조각공원이 그다음으로 보인다. 삐툴삐툴, 집들이 파란색, 하얀색으로 뒤죽박죽. 예쁜 어촌은 그리스 어디쯤이나, 이탈리아 어디쯤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나라는 시멘트만 덕지덕지. 흉측한 몰골. 금이 가고, 물이 빠진 집들로 레고 블록이 됐다. 하얗고, 파란 레고 블록 성은 언제부터인지 예뻐져 버렸다. 분명히 흉물이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만 쏙 빼놓고, 바닷바람과 짜고 그윽하게 늙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없다. 이건 거짓말이다. 내일이면 떠난다. 그래서 굳이, 서피랑까지 왔다. 째깍째깍. 시간이 간다. 몰랐다. 늘 두둑한 줄 알았다. 오늘은 째깍째깍, 마지막이라서 시간이 홀쭉해졌다. 남은 시간이 보이는 순간, 우린 예의를 갖추고 대한다.
원래는 죽림동 회센터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업 안 하는 날. 돌고래 횟집으로 간다. 8만 원짜리를 시켜서는 RCE 식구들과 먹는다. 된장과 참기름 범벅에 회를 먹는데, 담담하게 먹어도 되나 싶을 만큼 맛있다. 된장과 참기름의 조합은, 명심해야 할 맛이다. 통영에서 먹었던 어떤 음식도 좋았다. 경상도 음식은 별로. 이런 편견이 완전히 깨졌다. 굴튀김과 굴전, 굴밥이 한꺼번에 나오는 도시는 통영뿐이다. 샌프란 시스코에서는 굴 하나에 2달러, 3달러다. 그걸 먹겠다고 줄을 선다. 줄도 서지 않고, 개수로 셀 필요도 없이 뭉터기로 먹는다. 생크림을 제거하지 않은 우유맛이 난다. 해물가, 대풍관, 한마음 식당에서 정식을 먹었다. 평일이라면 해물가가 좋다. 전복, 소갈비, 굴을 함께 끓인 전골 때문이다. 평일만 가능하다. 대풍관과 한마음은 비슷하게 맛있다. 한마음의 자랑인 굴 삼합. 굴과 삼겹살, 콩나물 조합은 딱히 장점을 모르겠다. 그냥, 각각의 맛이다.
책 제목으로는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단골집'이 유력해지고 있다. '이토록 황홀한 한 끼'와 '대충 먹으면 몸살 나는 그대에게'도 못지않은 지지다. 1번, '안 가르쳐주고 싶다. 나만의 방콕 단골집'이 생각보다 저조하다. 모든 이들의 반응이 내겐 신비롭다. 백만 부 팔릴 책의 제목이 이렇게 탄생한다. 박민우는 입이 짧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단은 잘 먹는다. 잘 먹었다고 해서 꼭 다시 가지는 않는다. 기억을 되짚으며, 분석한다. 처음이란 이유로, 흥분했어. 차가워져서는, 쳐낸다. 곱씹을수록 괜찮은 곳만 또 간다. 나는 입이 짧다. 아니, 계산적이다.
"또 오세요!"
통영 RCE 식구들이 이별을 아쉬워한다. 통영에 머물면서 대구를, 광주를, 목포를, 부산을 다녀왔다. 전주에서, 진주에서, 부산에서 손님이 왔다. 세자트라 숲을 보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밤엔 좀 무섭다. 한밤의 숲을 무서워하다가, 포기한 듯 잠든다. 깊이 잠든다. 아침이 되면 늘 개운했다. 턱걸이를 하려고 가져온 다이소 장갑은 한 번을 못 썼다. 한 번의 큰 배앓이가 있었다. 손톱을 한 번 깎았고, 코털도 한 번 깎았다. 매일 양말을 빨고, 팬티를 빤다. 천장에서 나오는 온풍에 금세 마른다. 이젠 집으로 간다. 굳이 빨래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한다. 불필요한 일로, 불필요한 만족감을 느낀다. 예상했지만, 이순신 공원으로 터진 근사한 산책로는 심드렁해졌다. 잘 안 가진다. 대신 방에서 뒹굴뒹굴 볕이 들어오는 시간을, 본다. 밥때가 되면 구내식당에서 제육볶음이라든지, 오이 무침을 먹는다. 내가 그 누구보다 밥을 많이 푼다. 구내식당은 긴장되는 공간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맑게 인사한다. 밝은 모습을 미리 좀 연습한다. 억지라기보다는, 노력이다. 누군가에게도 불편해지고 싶지 않다. 약간만 노력하면 된다. 내가 어색하면, 누군가가 불편해지고, 나는 제대로 불편해진다. 나는 노력했고,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미움받을 용기란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 미움 좀 받으면 어때? 그 용기가 내게 없다.
내가 떠나는 게 아쉽다고 한다. 여러 번 말한다. 진심인 것 같다. 대구에서, 광주에서, 목포에서 그리고 부산에서 통영으로 향할 때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옻칠 박물관을 지나칠 때쯤이 제일 좋다. 이곳에 다시 오는 날, 내 모습이 궁금하다. 나는 그만큼 늙어서 쩔쩔맬 것이다. 팔자주름을 당기며, RCE 식구들을 두려워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다는 건 내겐 늘 공포다. 공포를 누르고, 오랜만의 재회에 두근거릴 것 같다. 세자트라 숲이 내 풍경이고, 세자트라 집이 내 집이다. 용남면 해안도로가 나의 풍경이다. 나의 자랑이다. 굉장한 고향이 생겼다. 집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