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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Sep 16. 2020

추억의 재구성, 최고의 한 시간을 맘껏 조립해 볼래?

이거 은근히 재미나네요

사진은 헤럴드 경제 신문에서 퍼왔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있어요. 그래서 제 이메일이나 계정 아이디는 대부분 모디아노로 시작하죠. 그래 봤자 고등학교 때 읽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단 한 권뿐이에요. 그것마저 끝까지 읽었나 의심스러워요. 그런데도 좋아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있어 보여서'였어요. 조각처럼 잘 생긴 소설가가 그렇게도 지루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풀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소설인가 보구나. 허세 가득한 이유죠. 사춘기 때니까요.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허세 가득한 제가 보는 눈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봐요. 자신이 얼마나 집요하게 과거의 하루를 기억하고 있나. 그것에 초점을 맞춰서 한 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수십 페이지로 늘려 놓죠. 이게 진짜 서사가 아닐까? 오히려 다른 작가들이 무책임하게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자기 멋대로 건너뛰고, 생략하는 이야기꾼은 다 사기꾼(이 제 취향입니다).


인스타그램으로 프랑스 여자가 메시지를 보냈더군요.


-혹시 파트릭 모디아노를 좋아하니?

-어떻게 알았어?

-메일 주소가 모디아노여서 물어봤어. 우리 할아버지야.


어릴 때 꿈이었어요. 파트릭 모디아노를 한 번 만나 보는 게요.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첫 장에 나오는 딸의 딸일 수도 있겠군요.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자전적 소설이고, 첫 장에서 딸의 출생 신고 과정을 지리멸렬하게 묘사해요. 아니,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장황하게? 러시아 소설의 웅장한 묘사를 해독하는 마음으로 어린 나이에 꾹꾹 참아가며 책장을 넘겼더랬죠. 진짜 손녀인지 아닌지는 누가 알겠어요? 손녀라는 여자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세상 재미나게 살더군요. 요트에, 파티에, 여행에. 상류층의 여유로운 삶. 저는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요.  


-산다는 건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


르네 샤르의 글을 인용한 문구래요.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한 줄이죠. 후벼파지 않나요? 추억이 주는 울림에서 무덤덤해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에게 마음대로 추억을 고를 수 있다면, 조각조각 붙여서 최고의 한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일단 겨울을 택하려고요. 모든 계절이 좋았지만, 사무치는 추억은 아무래도 겨울이네요. 전봇대 주위로 밤톨만 한 눈이 선명한 밤이었으면 해요. 아버지는 무슨 일로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 오셔야 해요.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우리 집 김장을 끝낸 날이기도 하죠. 저녁엔 갓 담근 김장 김치에 싱싱한 굴을 듬뿍 얹어서 된장찌개와 먹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야겠어요. 도화지를 오리고, 지구표 색연필로 조심조심 전나무 트리를 칠하고, 산타 클로스도 그려야죠. 창호지는 아무래도 구멍이 뚫려있는 게 좋겠어요. 차가운 바람도 불어줘야 이불을 돌돌 말고 누울 수 있으니까요. 창호지로 쏟아지는 눈발이 선명했으면 좋겠네요. 이토록 고요하게 스며드는 소음은 오래오래 끊기지 않아야 해요. 드디어 형이 보물섬을 다 읽었어요. 동아 전과는 쳐다도 안 보는 형이 보물섬은 봤던 페이지를 보고 또 봐요. 이현세의 '고교 외인부대'를 어서 빨리 봐야 하는데 말이죠. 어떻게 만화만 채운 잡지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요? 세상에 천재는 정말 많아요. 태준이 형네서 빌려온 소년중앙도 오늘 밤 다 보고 자야겠죠? '달려라 꼴찌'에서 독고탁이 드라이브 볼에 이어서 더스트 볼을 개발해요. 뱀처럼 휘는 마구만으로도 이미 대단한데, 갑자기 사라지는 더스트 볼까지 장착했으니 천하의 강타자 차리 김도 독고탁을 이길 방법은 없겠네요. 이런 눈이라면 내일은 연탄재를 굴려 만든 눈사람이 여러 개 나올 수 있겠어요. 앞집 준이형이 마음만 먹으면 이글루도 가능해요. 그 형은 어떻게 눈만으로도 집을 지을 수가 있을까요? 이글루는 우리 초롱이가 저보다 더 좋아해요. 제가 이글루 안에서 자는 척 누워 있으면 제 코 끝을 분홍색 혓바닥으로 핥아줄 거예요. 몇 밤만 자면 겨울방학에 크리스마스고요. 몇 밤만 자면 MBC 10대 가요제를 해요. 1월 1일에는 미아리 대지 극장에서 성룡의 '쾌찬차'를 볼 거고요. 변웅전이 진행하는 MBC 묘기 대행진에서 의자를 열 개 쌓아놓고 물구나무를 서는 묘기꾼도 볼 거예요. 그런 겨울밤이에요.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저는 '달려라 하니'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해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귤은 기본이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스파이더맨이 된 상상을 해요. 글을 쓰면, 손바닥에서 거미줄이 슝슝 나오는 상상이요. 그렇게 멀리멀리 누군가에게 닿는 거죠. 서로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영향력이면 딱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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