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준비하는 사람들

나는 전설에 초대되었다

by 박민우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난다. 브런치를 쓴다. 지금 시점으로는 어제. 일곱 시에 나선다. 경기도 광주역까지 25분. 경기도도 엄연히 시골. 풍경이 운율, 아침이 여백이다.


전철이 붐빈다. 기분이 좋다. 나도 직장인. 열심히 산다. 사실은 시한부 직장인이라서, 산뜻한 감정.


미금역 7번 출구, 14번 고기리행 마을버스. 한 여자가 버스를 놓친다. 눈 앞에서 1분 이상 서 있던 버스다. 스마트폰을 보느라 놓쳤다. 버스가 움직이자, 그제야 아차. 놓칠 수 없는 버스를 놓치는 삶. 그러지 말자. 아니, 잠깐. 내 글을 읽다가 버스를 놓쳤다면? 그런 글을 쓰자. 다짐한다.


14번이 서는 버스 정류장 이디야 카페 앞 테라스. 남자가 담배를 깊게 빤다. 깊게 빨고 매장으로 들어간다. 사장인가 봐.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손님이 뜸한 시간은 담배가 맛있다. 내가 수내동에서 파스타집을 할 때 그랬다. 담배를 참 많이 피웠다. 계속 파스타집을 했다면, 담배를 못 끊었을 것이다. 파스타집 이름은 행복한 스파게티였다.


14번 버스가 왔다. 한 아주머니가 내 앞을 막는다. 새치기. 아주머니 어깨를 잡고 싶다. 뭐 하시는 거예욧. 당연히 안 그런다. 나이 마흔일곱에 아주머니는 또 뭘까? 마흔여섯 남자가 나보고 한참 형인 줄 알았단다. 내 얼굴도 오십이다. 오십 넘은 중늙은이다. 새치기를 한 아주머니도, 할머니는 아니다. 할머니도 아니고 아주머니도 아닌 여인,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닌 나. 모호한 나이가 우글우글. 90년대의 내가 그냥 나 같다. 버스에선 김건모 노래도 가끔 들리고, 김혜림의 날 위한 이별도 들린다. 지방 옷 가게, 화장품 가게에선 90년대 노래뿐이다. 그때가 지금도 섞여있다. 늙는 나를 못 받아들이는 건 나뿐만은 아니다.


분당과 고기리는 마을버스로 28분 거리지만, 전혀 다르다. 아파트에서 갑자기 한적한 시골이다. 작은 마을버스에는 잘 생긴 NBA 선수 같은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도 있다. 이런 외떨어진 곳의 외국인. 왜 이곳일까? 궁금하다. 너, 왜 고기리에 사니? 그냥 놀러 왔니? 커피나 한 잔 할래? 이런 사람이고 싶다. 절대로 그럴 일 없다. 내게 가끔 그렇게 다가왔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고맙다. 미국인이 많았다. 오지랖 넓은 것들. 쉽게 다가가고, 웁스, 쏘리, 쉽게 돌아선다. 고 생각한다. 낯선 이들에게 용기를 내는 것. 어쨌든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것. 무릅쓰는 것. 그들도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런 우연을 만들어 보겠다. 정말? 박민우, 네가 그럴 수 있겠어? 아무래도 못할 것 같다.


빈자리가 났다. 내 차지다. 내 무릎 앞이니까, 내 자리. 새치기 여인은 서있다. 그녀에게도 교훈이 되기를. 내게는 교훈이 됐다.


- 앞 머리를 내리니까 나아 보이죠?


별 다섯 커피 김이사(님)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다. 많으시다. 존칭을 꼭 붙여야 하는데, 글을 쓰는 공적인 자리니까. 그냥 김이사라고 한다. 맞는 표현법은 뭘까? 일기라고 쓰면서, 공적인 일기로 못 박는다. 내가 모순에 박힌다. 김이사 님이 앞머리 이야기를 꺼내(시)는데, 그새 굉장히 가까워진 기분이다. 며칠 만에 많은 경계가 허물어졌다. 직장에서 경계가 허물어지는 건 위험하다. 선을 넘으면, 상처가 된다. 경계가 안심이다. 그래도 따뜻하다.


- 훨씬 젊어 보여요.


훨씬 젊어진 김이사 님은 2019년 봄이 유난히 바쁘(시)다.


김이사가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계열 소속사의 상무가 오랜 지인이라며 전화를 건다. 방탄소년단이 별 다섯 커피를 마시기만 하면, 무조건 인스타에 올려주겠지? 흥분한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나사(NASA) 직원 같다. 아, 요즘엔 얼굴도 못 본다네요. 그래도 계속 연락해 봐야죠. 김이사 님, 참 해맑다. 기적은 해맑은 사람에게 온다. 김이사가 사무실에 놓고만 온 커피를 방탄소년단 랩몬이 보는 거지. 호기심 못 참고, 바른말 못 참는 랩몬이 게다가 커피광인 거야. 눈치 빠른 매니저가 별 다섯 커피콩을 그라인더로 갈아. 공항으로 지금 가야 하는데, 무슨 판을 벌려? 왕매니저가 화도 한 번 내. 아, 형. 이것만 마시고 좀 가요. 랩몬스터도 짜증 한 번 내고. 그리고 그라인더 뚜껑을 열지. 나처럼 사지가 벌렁거리는 전율이 와. 이 커피 가지고 가도 돼요? 별 다섯 커피, 헤이, 듀드! 잘 마시고 있다는 인증샷을 인스타에 올려. 이런 상상, 너무 재미나다.

BTS 강림 중이십니다

- 박막례 할머니에게 우리 커피를 보내려고요. 할머니가 바리스타가 되는 과정을 유튜브로 보여주자고 제안했어요.

-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가요?

-아뇨. 저도 유튜브 보고 알았죠.


박막례 할머니는 유튜브 대스타다. 치매가 걱정돼 손녀가 만들어 준 계정이다. 참, 그 손녀, 찡하다. 우리 어머니보다 두 살 많다. 올해로 일흔셋. 원래 밥집 할머니는 유튜브 앞에서 화장하고, 사투리 쓰고, 맞춤법 파괴 댓글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나의 어머니가 하겠다면, 나는 이민 갔을 것이다. 세상이 열광한다. 할머니 손에 큰 지금의 이십 대들이 특히 열광한다. 할머니가 어머니만큼 가까운 친구들. 나는 그 시장을 읽지 못했다.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가 대박 날까요? 누가 묻는다면, 도리도리. 안 된다에 백만 원 걸겠소. 장담했을 것이다. 유튜브 본사 CEO가 굳이 한국까지 와서 할머니를 얼싸안더라. 이런 내가 유튜브 대스타를 꿈꾼다. 장 대표(님)는 맨땅에 헤딩하듯, 박막례 할머니 측에 연락한다. 내게 다가올 때도 마찬가지. 글이 좋으니 연락부터 하고 본다. 맨땅에 헤딩이 당연한 남자다. 좀 내가 섣부르긴 하지만, 전설의 시작이 감지된다. 이미 다 이루어놓고, 그걸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남자 같다.


내 삶도 덩달아 휘몰아칠까? 지금이야 뭘 알 수 있을까? 나의 유일한 약속. 흔들릴 수 있을 때 열심히 흔들리기. 힘을 빼면, 온다.

고기리의 봄, 저 끝에 별다섯 커피 공장 간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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