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없는 태국에서 살다 보면 한국의 겨울이 그립습니다
전 추운 건 질색이라서요. 태국에서 살래? 한국에서 살래? 누가 물으면, 망설이지도 않고 태국이요. 할 거예요. 따뜻한 곳이 좋아요. 퍼진 잡채처럼 이완된 제 몸이 좋아요. 사람 간사한 거 아시죠? 그래도 지금 저에게 없는 '한국의 겨울'이 그립기는 해요.
1.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 같은 추위가 그리워요
추운 건 질색이라면서, 왜 딴 소리냐고요? 매서운 추위는, 따뜻함을 대비시켜 주니까요. 기온이 뚝 떨어지면 버스가 또 그렇게 안 와요. 발을 동동 거리다 버스에 오르면, 획기적으로 달라진 온기가 가득 차 있죠. 버스 창도 안경도 김으로 흐릿해져서 급히 안경을 웃옷에 닦고 빈자리에 앉아요. 바깥은 자비 없는 바람이 몰아치고, 버스 안은 아늑해요. 추위가 모질수록, 딱 그만큼 아늑해지는 버스 안이 그립네요.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나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이 버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더 좋고요.
2. 따끈따끈 열탕에 몸을 지지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찜질방과 목욕탕의 나라죠. 단위 면적당 이렇게 많은 목욕탕이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어딜 가도 흔한 줄 알았어요. 태국엔 일본식 온천이 있기는 해요. 한인 타운 가면 한국식 목욕탕도 있고요. 비싸요. 목욕 한 번 하자고 버스, 지하철 갈아타면서까지 가고 싶지도 않고요. 겨울이 없는 곳에서 목욕탕은 반쪽 짜리죠. 추위로 온 몸이 꽁꽁 얼어서, 열탕으로 달려가야죠. 유리로 만든 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쾌감이 열탕 속에 있죠. 영하의 나라에서 동태처럼 꽁꽁 얼어야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이죠.
3.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어묵탕 한 사발, 캬아아
노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시키고, 종이컵으로 어묵 국물을 홀짝거리고 싶어요. 무와 청양 고추로 우린 깔끔한 어묵 국물을 음미하면서, 어묵을 한 개 먹을까? 화끈하게 세 개를 먹을까? 모락모락 김에 둘러싸여서 시답잖은 고민을 하고 싶어요. 튀김을 떡볶이 양념에 무쳐 달라고 하면 떡볶이 한두 개를 보너스로 주실까? 안 주실까? 나에게나 의미 심장한 긴장감도 느껴보고 싶어요. 내장 빼고 순대만 주세요. 이렇게 주문하면 좋아하실까? 싫어하실까? 답은 알고 싶지도 않은데, 궁금해만 하고 싶어요.
4. 호빵 통을 보고 싶어요
삼립 호빵은 제겐 겨울의 상징이에요. 어릴 때 구멍가게 풍경은 지금과 달랐죠. 미원과 다시다가 매달린, 하얀 모빌이 대롱거렸어요. 동그란 아이스박스도 있었어요. 전기가 전혀 필요 없는 냉동고였죠. 고무 재질 뚜껑을 열면 깐도리나 쭈쭈바, 쌍쌍바가 가득 들어 있었어요. 겨울의 시작은 호빵 통이죠. 가게 입구 쪽에서 온기를 내뿜기 시작하면, 나뭇가지는 재빨리 앙상해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어요. 호빵이 지금처럼 맛있지도 않았어요. 한참을 파고 들어가야 팥이 나오고, 소가 나왔어요. 호빵 통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먼저 전국에 깔리는, 그 일사불란함이 좋았어요. 막상 먹으면 별로인데, 그래도 호빵을 손으로 감싸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죠. 그 따뜻한 호빵의 촉감을 느끼고 싶네요.
5. 한국의 들끓는 크리스마스에 동참하고 싶어요
모든 나라가 크리스마스면 식당 빈자리가 없는 줄 알았어요. 빈자리가 없긴 없죠. 아예 가게, 상점들이 문을 닫으니까요. 파리의 크리스마스는 무슨 악몽 같더군요. 공동묘지 같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해겐다즈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만 달랑 열었더군요. 그거라도 먹어야지. 어떻게 해요? 서양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죠. 여행자에겐 너무도 외로운 날이기도 해요. 태국은 흥성거리기는 하지만 한국만큼은 아니에요. 한국은 크리스마스가 최고 명절 아닌가요? 젊은 사람으로 한정하면요. 요즘은 핼러윈인가요? 추석이나 설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10%나 될까요? 세뱃돈 수혜자들 빼고요. 크리스마스에 종로나 이태원을 걸어보고 싶어요. 구세군과 시청 앞 트리를 보고 싶어요. 와인 한 병 들고가서, 독거 친구와 밤새 수다를 떨고 싶어요. 겨울이 좋으신가요? 싫으신가요? 아무 생각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싫어하는 게 낫죠. 겨울 다음엔 봄이니까요. 봄을 기다리는 재미로, 겨울을 마음껏 싫어하는 것도 좋죠.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아무 생각 없이만 살지 말자고요. 2020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요. 지긋지긋한 코로나 앞에서도, 시간은 이렇게도 빨라요. 정말 자비 없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아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죠. 매일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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