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암 제다원, 완벽한 소풍

구례와 하동, 이렇게 예쁜 곳이었어?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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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혼부부네서 하룻밤을 잔다. 마사만 커리를 해주기 위해서 굳이 광주까지 왔다.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시작된 인연이다. 방콕에서 밥 한 끼였다. 아내가 내 책을 남편에게 강요하고, 둘은 독자로 나와 마주했다. 호가든 맥주에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방콕의 밤을 채웠다. 전라남도 장성 펜션 반디앤블루에서 독자들과의 자리가 있었다. 편백나무 숲을 등진 근사한 펜션 주인이 또 독자다. 어머니까지 초대해 주셨다. 편백나무와 별, 삼겹살과 깨끗한 반신욕의 밤이었더. 엄마의 아들이어서, 아들의 엄마여서 감사하고 감사한 밤이었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다음날 밤이었다. 허허. 혼자만 반디앤블루에 남게 됐다. 반디앤블루 가족도 좀 떨어진 집으로 퇴근한 상황. 숲은 분명 아름다우나, 사소한 소리는 귀신의 발자국. 밤도깨비가 자꾸 기웃거린다. 광주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반디앤블루 사장님께는 광주 부부가 나를 데려가려고 난리라고 했다. 이 아름다운 곳에 겁을 먹다니. 지금이라도 고해한다. 이젠 얼마든지 홀로여도 된다. 그때는 내가 약간 멍청했을 뿐. 반디앤블루 하얀 욕조, 차가운 맥주, 장성의 하늘, 별. 반디앤블루. 누구라도 한 번은 머물러야 하는 천국. 글을 썼더니, 반가운 존재가 됐다. 무수한 인연이 실감 나면, 두려울 정도로 황홀하다.


둘은 나를 광주로 데려가서는 삼겹살을 먹이고, 치아바타를 먹이고, 장독대에서 한식을 먹였다. 목포 해양대학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차로 데려다주고, 해양대학 김 교수와 민어를 먹었다. 동명동 카페거리 플로리다에서 미숫가루와 아이스크림 풍덩 라테를 사줬고, 앙버터와 광주 궁전제과 나비 파이를 먹였다. 삼겹살을 먹던 날은 비가 내렸다. 듬뿍 비였다. 삼겹살 집 이름은 창고. 간판 한쪽에 '신이 내린 마지막 한 점'이라고 쓰여있다. 내가 방콕 맛집 책 제목으로 속이 문드러지는데, 제목 천재는 광주 선운지구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백이면 백 놀랄 만한 삼겹살이었다. 지글지글 굽는 소리, 추적추적 빗소리. 기억에 소리까지 담겼다. 그런 순간을 함께했으니 각별해질 수밖에.


아침부터 김밥을 싼다. 구례를 다녀오자고 한다. 이럴 때가 아닌데... 진짜 진짜 마지막이어야 하는 방콕 맛집 책 수정본이 메일로 와 있다. 고기리 별 다섯 커피를 이틀 못 갔다. 모든 토요일이 꿈꾸는 날씨다. 가기로 한다. 내 안의 모든 부담감을 싹싹 지우고, 자발적인 즐거움만 남겨둔다. 그 마음으로 마지막 원고를 보고, 별 다섯 커피로 출근하겠다.


매암 제다원은 구례가 아니라, 하동에 있다. 구례와 하동은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 걸까? 한걸음에 경상도고, 한 걸음에 전라도다. 전라도 사람이, 순식간에 경상도 사람으로 바뀐다. 매암 제다원은 차밭이다. 찻집을 소박하게 꾸며놨다. 테이블만 내놔도 그림 같은 풍경이 받쳐준다. 제다원의 목조 주택은 유명한 포토존이다. 차밭과 산을 마주하는 등짝 사진은 인생 사진이 된다. 사진에 죽고 사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우글우글 줄을 선다. 좋은 날씨, 토요일, 예쁜 김밥, 예쁜 차밭, 향긋한 차, 줄무늬 돗자리. 소풍의 모든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에게 주워 담긴다. 바다가 마주한 곳으로는 통영, 산을 마주한 곳으로는 구례. 내 마음속 두 곳. 한가하게 소풍 갈 때인가?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구례의 풍경에, 하동의 풍경에 녹았다. 왜 사람들이 제주에만 몰리지? 내겐 필적할 만한 풍경이고, 분위기다.


- 와, 사진 정말 잘 나오네요


젊은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나는 사진 찍히는 법을 안다. 이미 잘 생긴 사람들은 안 해도 될 고민. 20년 고민 끝에 얼굴 조작에 성공했다. 입을 활짝 찢고 눈에 힘을 준다. 작은 눈은 안 작아 보인다. 큰 입이 이때만은 장점이 된다. 입이 찢어져라 웃으세요. 젊은 친구는 내 조언에 다시 앉는다. 여자 친구에게 찍어달라고 한다. 나를 흉내 낸다. 내가 그에게 작은 충격이었다. 웃을 때만 잘 생겨지는 얼굴. 그럼 계속 웃으면 된다. 못 생긴 얼굴이 기본값이 아니라, 잘 생긴 얼굴이 기본값이 된다. 어떻게 24시간 내내 웃어? 서너 시간만 웃지, 뭐. 하루 서너 시간 잘 생겨지면 충분하다. 내가 가진 것을 좀 과소평가했나? 젊은 친구가 홀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이런 토요일을 또 같이 했다. 그만큼 쌓였다. 둘은 방콕에서 봤을 때보다 어째 좀 아웅다웅. 좀 더 아웅다웅하고, 좀 더 늙어라. 뻔뻔해져서 또 보자고. 인연은 세상 어떤 줄보다 길어서, 시공간에 모두 걸쳐있다. 따로 늙다가, 섞이는 지점에서는 함께 늙는다. 찌개처럼 함께 끓어서, 깊은 맛을 낸다. 묵은지 찌개가 그래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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